재택근무 승인해준 관리자가 읽으면 안 되는 글
숨죽이며 봄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다 봄을 만끽하지 못하고 계절이 바뀌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요즘 창밖 너머 길가에 피기 시작한 벚꽃을 보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감사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성가셨던 일들도 어찌나 그립던지. 사회적 거리는 두어도 마음의 거리를 챙기는 하루이길 바라며.
지난주 난생처음 재택근무를 했다. 비록 4일, 코로나 19로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한 재택근무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꿈에 그리던 디지털 노마드의 삶. 4일 동안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직장 생활을 한 셈이다. 디지털 기기만 있으면 때와 장소 상관없이 일이 가능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누구나 꿈꾸지 않을까.
하지만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생각보다 녹록하지만 않았다. 반강제적으로 준비 없이 시작한 재택근무. 한마디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장비 탓을 해야 할지, 재택근무와 육아, 집안일 사이를 경계 없이 넘나든 것을 탓해야 할지. 재택근무 4일 동안 한 가지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아무나 성공하지 못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 글은 재택근무를 승인해준 관리자가 읽으면 안 되는 글이기도 하다. 4일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 재택근무 전날
전날이 오히려 바빴다. 일단 재택근무를 위해 인증서를 USB에 복사했다. 집에서 문서 작업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원격 업무지원 서비스. 페이퍼 한 장 짜리 신청서를 작성하고 관리자에게 재택근무 신청했다. 그때 일일 업무 보고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반나절이나 걸린 재택근무 신청으로 꽤나 바빴다.
#재택근무 1일 차
호기롭게 시작한 채택 근무 첫날. 근무시간에 항상 메신저를 켜야 했다. 부랴부랴 집에 있던 노트북을 켰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메신저를 다운로드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5년 전에 구입한 노트북 사양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는지 버퍼링으로 계속 설치가 지연됐다. 이것저것 설치하는 데 30분은 걸린 것 같다. 그때 처음 알았다. 재택근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컴퓨터 최신 사양이란 것을.(장비 탓을 안 할 수 없다)
여러 개의 창을 동시에 띄우면서 작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나씩 작업해야 했다. 얼마나 속이 터지던지 노트북을 내리치고 싶은 심정으로 일했다. 느려진 업무 속도로 더 이상 일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래 들으려 했지만 유튜브 영상까지 계속 다운되었다. 으악! 첫날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하필 그날 누전 차단기가 내려갔다. 냉장고와 보일러 실 쪽 다용도실에 있는 콘센트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쪽이었으면 안 급했을 텐데 냉장고가 꺼져서 바로 고치지지 않으면 안 됐다. 그 일을 처리하는데만 반나절이 걸렸다. 그렇게 시작된 재택근무 첫날 업무는 앱, 메신저 설치와 육아, 집안일이 전부였다.
#재택근무 2일 차
출근하지 않는 남편이 있어서 마음을 놨는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몰라도 아내는 도통 일어나지 못했다. 기상과 동시 두 아들, 아내 아침밥을 준비했다. 메뉴를 뭐로 할지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대충 썰어 넣고 끓이면 완성되는 카레를 만들었다. 7시에 기상하는 두 아들은 이미 거실에서 놀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출근 준비했을 그때에 아침 밥상을 준비했다.
결국 재택근무를 포기했다. 이러다간 일을 못 하게 생겼다. 두 아들과 한 공간에서 업무를 보기 힘들었다. 도저히 속 터지는 노트북으로 일을 했다간 성격 버리겠다 싶어 집을 나왔다. 결국 10시에 출근하고 말았다.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은 근무지였다. 재택근무를 위한 환경이 뒷받침 안 되는 나로서는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사치에 불과했다. 내게 안 맞았다. 아날로그의 삶이 오히려 편한 건 나뿐인가. 익숙한 공간에서 정해진 시간에 서류 틈에 일하는 게 오히려 안정감이 있었다. 룰루랄라 음악과 함께 커피 한잔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전날 일일보고까지 마치고 다시 집으로 갔다. 사실상 업무는 오전으로 끝났다.
오후에는 잠에서 못 깨어나는 아내 대신 밀린 집안 일과 두 아들 보는 일에 사용됐다.
#재택근무 3~4일 차
역시 출근해서 오전 동안 업무를 처리했다. 말이 재택근무지 그냥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근무지에서 일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집에서 업무처리는 불가능했다. 육아, 집안 일과 경계 없이 넘나 드느라 업무는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것은 업무 처리를 할 수 없는 근무 환경도 한 몫했다. 만약 다시 재택근무를 한다면 새 노트북을 사기로.
이번 주 금요일, 다음 주 월, 수, 금 간헐적 재택근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주일 내내 집에서 근무하기에 아직 준비가 덜 됐다. 새 노트북은 고사하고 포맷했으니. 그냥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직장인으로 만족해야 하나 보다. 이 글은 관리자분들이 안 읽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