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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Dec 10. 2020

현실보다 더 진실한 거짓말의 세계

켄 리우, <종이 동물원>


소설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때때로는 진짜보다 더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Science Fiction은 소설이라는 거짓말의 세계에서도 한층 더한 거짓말로 이루어진다. 거짓말쟁이 중에 으뜸  거짓말쟁이랄까. 그렇지만 SF는 ‘어차피 이건 다 거짓말이야, 다들 알지?’ 말하면서 현실보다 더한, 현실에서는 차마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할 진실한 세계를 담아낸다. ‘이건 거짓말이니까 믿지 마’라고 상대의 마음을 허물어놓고 현실에서 그 누구도 쉽사리 꺼내지  못할 이야기들을 건넨다.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이 담고 있는 세계가 그렇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읽어보라. 그 누가 이 이야기를  거짓말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제목부터가 그렇다. 제목만 본다면 누구라도 ‘아니, 이런 제목의 작품이 어쩌다가 이 SF  단편 모음집에 실린 거지? 잘못 실린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틀림없이 ‘Science  Fiction’이다. 그런데 몇 장만 넘겨보아도 그 안에서 묘사하는 세계는 진짜보다 더한 진실을 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참혹하리만치. 이 책의 첫 번째 작품인 「종이 동물원」에 마음을 빼앗긴 채, 거의 모든 작품마다 감탄하며 읽어가다가 이 마지막 작품에서는 켄 리우라는 작가, 그의 시선과 열정에 사뭇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시간여행은  이제 이런 SF 장르에서는 너무나도 흔한 소재이다. 새롭지 않은, 매우 익숙한 거짓말이라 ‘에, 또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좀  새로운 거짓말을 해봐!’ 하는 생각까지 든다.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겠는가? 이 질문을 받고 당신은 지금 어느 아름다운 과거의 한때를 떠올렸는가? 그런데 시간여행을 제안한 사람이, 그저 한  개인의 일상적인 삶,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이 아니라,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참혹한 순간으로 가보자고 말한 것이라면? 예를 들어  히틀러에 의해 수많은 유대인이 희생당한 아우슈비츠 현장이거나, ‘아시아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는 731부대가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고 생체실험을 자행한 현장이라면? 당신은 과거로 돌아가 그 현장을 목격할 의향이 있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이 그  현장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고개를 돌려버릴 것이다. 이 작품에 묘사된 장면만 보고도 솔직히 나는 힘들어서 책을 읽다가  전철에서 내려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그런데 누가 19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굳이 그 부대의 잔학 행위를 직접 두  눈으로 보려고 하겠는가.

켄 리우는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을 통해 그 끔찍한 역사를 다시 불러온다. 이 작품에서 그런 시간여행이 가능하게 만든 ‘에번’과  ‘기리노’처럼 기계를 통해 그 과거를 직접 볼 수 있게 하지는 않지만 ‘글’로써 우리 눈앞에 그 과거를 재현한다. 이 작품은 일본  고대사 전문가인 에번과 그의 아내이지 저명한 물리학자인 기리노가 발명한 기술을 통해 과거를 직접 볼 수 있게 된 미래를 배경으로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의 ‘역사 갈등’을 다룬다. 다큐멘터리 영화 형식으로 각국 정부 관계자 및 학자, 731부대 희생자 유족  등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진행된다. 731부대의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한편, 관련자의 증언과 일본의 로비, 미국 정치계의 대립  등을 거의 현실과 똑같이 구성해서 작품을 읽는 내내 ‘이건 픽션’이 아니라는 생각이 여러 차례 들게 한다. 


물론  그 소재는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여전히 ‘그 일’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구는 각국의 여러 관계자가  존재하고, 또 그들이 만들어낸 ‘진짜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떠벌리는 사람들은 그냥 관심을  받고 싶은 거예요. 그 왜, 2차 대전 때 일본군한테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 매춘부들처럼.”(「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중 )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켄 리우 스스로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이야기’라고 말했음에도 그의 단편집이 일본에서 출간될 때 이 작품은 수록되지 않았으며, 중국 또한 공산당에  비판적인 내용이 나오는 부분을 삭제한 채 불완전하게 출간됐다고 한다. 동북아시아 4개국 가운데 이 작품을 완전한 형태로 출판한  나라는 대만과 한국뿐이라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Fiction’ 임에도 일본과 중국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작품이  거짓말의 형태를 빌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고도 남으리라.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하니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의 모든 작품이 그런 게 아닐까 지레 겁먹거나 그렇게 무거운  이야기는 싫다고 고개 돌리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종이 동물원>에 실린 모든 작품은 환상적일  정도로 흥미롭고 재미나면서도 아름답고 슬프다.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한 편으로도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준 종이동물들이 그때는 생생히 살아 움직이다가, 엄마와 소원해지면서 동물들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설정은 자칫 지나치게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곧 ‘아빠는 엄마는 카탈로그에서 골랐다’라는 문장을 마주하는 순간, 이 마법  같은 이야기 속에 ‘무언가’가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단순히 마법으로 이루어진 ‘환상’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중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의 정체성의 혼돈, 어머니의 굴곡진 역사와 삶, 그리고 ‘사랑’때문에  마지막에 가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마법’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진실’ 그 자체이다.

이  책 내내 이런 이야기는 계속된다. 아편 전쟁 직후 서양 열강에 침탈당한 중국을 배경으로 한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는 여우  요괴가 등장하고 그 요괴를 사냥하는 사냥꾼도 나온다. 미국인 소녀와 중국인 점술가의 우정을 그린 「파자 점술사」에서는 2·28  사건처럼 굵직한 대만 현대사를 동시에 담고 있다. 일본이 미국과 손을 잡고 태평양 횡단 해저 터널을 만들어 대공황을 타개, 식민  지배를 이어간다는 가상의 역사를 소재로 한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를 비롯해, 소행성 충돌로 멸망한 지구를 뒤로 하고 살아남은  인류가 우주선 한 척에 올라 외계로 나아가는 미래를 그린 「모노노와레」 등 가상현실과 실제 역사의 기억을 절묘하게 배치한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다가 어느 순간 ‘툭’하고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하드보일드 누아르를 보는 듯한 느낌인「레귤러」도 기억에 남는다.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을 여성 사립탐정이 해결해 간다는 설정도 예사롭지  않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보조 장치로, 법집행 기관에서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가상의 장치  ‘레귤레이터(regulator)’라는 아이디어도 흥미롭다. 다른 작품에서도 간간이 엿보였지만 특히 이 작품에서는 켄 리우의  여성관이 잘 드러나는데,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낸다는 점, 넓은 포용력으로 상처를 지닌 다른 이들을  끌어안는다는 점 등등 주로 긍정적인 면이 많아서 켄 리우를 나도 모르게 내 마음속 ‘좋은 작가군’에 넣게 된다. 비단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뿐만 아니라 작품 하나하나 엄청나게 공부하고 성실한 자세로 꼼꼼하게 썼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러면서도 쉽게  읽히고 아름답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점점 켄 리우, 그가 궁금해지고, 그 감정은 호감에 가깝다. 

중국에서  태어나 열한 살에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계 미국인 켄 리우. 그런 정체성 때문인지 「종이 동물원」처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도  있으며 중국과 홍콩 대만 등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의 한 조각을 다룬 이야기도 많다. 인류의 역사, 즉 거시적인 기억은  물론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 한 인간의 역사를 다룬 이야기도 많다. 이렇듯 켄 리우는 기억을 재현하고 보존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작품에서 ‘기억 같은 거 어차피 먹지도, 마시지도, 입지도 못하잖아요’(「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중)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는 왜 이토록 인류의 기억 또는 한 개인의 기억에 집착할까? 아마도 이 또한 작품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만약 사람들이 과거를 보고 들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더는 냉담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을 거라’(「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중)는 말처럼……. 켄 리우는 SF라는 ‘거짓말’의 세계, 이야기의 힘을 빌려,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  ‘진실’을 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별 다섯 개가 아닌 여섯 개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더 늦기 전에 당신이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바로 <종이 동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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