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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Dec 11. 2020

아녜스 바르다를 향한 애정 넘치는 헌사

아녜스 바르다, <아녜스 바르다의 말>



프랑스 영화를 좋아한다. 누벨바그 작품들. 고다르,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루이 말, 에릭 로메르 등등 그 황금 시절의 영화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이제는 사라진 극장, 대학로의 ‘하이퍼텍나다’ 그곳에서는 ‘시네마프랑스’라는 이름 아래 이 눈부신 영화들을 자주 상영하곤 했다. 그곳에서 내가 처음 보았던 프랑스 영화가 뭐였더라? 대학생 시절,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채로 프랑소와 트뤼포의 <쥴 앤 짐(Jules And Jim)>을 본 기억이 떠오른다. 하나의 센세이션이었다. 그 뒤로 나는 목마른 사람이 샘물을 발견이라도 한 듯이 프랑스 영화, ‘누벨바그’ 기수들이 만들었다는 그 영화들을 찾아보고 다녔다.

그럼에도 아주 오랫동안 ‘아녜스 바르다’ 이 여성의 이름은 알지 못했다. 오늘날 ‘누벨바그의 대모’라고 불리는 그. 지난해 세상을 떠난 이 작고 통통한 수다쟁이 할머니의 모습을, 그렇게 ‘할머니’가 된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럴 수가! 영화 좀 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프랑스 영화를 많이 봤다고 생각했음에도 그의 이름은 고다르나 트뤼포에 비하면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말>에서 그이가 말했듯이 “잊힌” 것은 아니었을까? ‘누벨바그의 대모’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고다르나 트뤼포에 비해서는 덜 중요하게 다뤄졌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이 책에도 그런 사례가 몇 차례 언급된다. 남성 감독들에 비해 덜 중요하게 다뤄진 ‘누벨바그의 대모, 아녜스 바르다’. “1980년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프랑스 영화를 주제로 두 차례에 걸쳐 특별호를 발행했는데 저는 지나가면서도 언급이 안 됐죠. 제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요. 저는 그저 잊힌 거예요.”(209쪽)

바르다는 1928년 벨기에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프랑스로 옮겨가 바닷가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성장, 소르본 진학해 공부를 마친 뒤 에콜 뒤 루브르에서 4년 동안 미술 지식을 익혔다. 루브르에서의 기간은 그가 사진가로서 성공을 거두는 데 밑거름이 된다. 스무 살 때 국립민중극장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되었고, 1954년 드디어 첫 영화 <라 푸앵트>를 만들었는데 그때는 영화 문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트뤼포나 고다르 같지 않았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때만 하더라도 일생동안 본 영화가 다 합쳐도 고작 다섯 편 정도일뿐이었다고. 바르다가 사진과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꽤 흥미롭다. 그가 소르본에서 공부할 때 한 철학 교수가 사물을 ‘보는 방식’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전까지 바르다는 박물관 큐레이터를 꿈꾸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돌아가신 그 철학 교수’가 온통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이다. 그 철학 교수의 이름은 바로 ‘가스통 바슐라르’. 그렇게 사진가가 되고 영화감독이 된 바르다. 바르다는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가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여성 감독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서 어떤 이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영화를 만드는 일은 고되지 않았느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그러자 바르다는 말한다. “나는 한 인간이고, 영화를 만들고 싶을 뿐이다. 힘들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113쪽) 바르다가 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때는 프랑스에 여성운동이라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의심의 여지없이 페미니즘은 바르다의 가장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사회적 관계도 그렇고 사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죠. 이러한 정체성 찾기는 영화감독으로서도 의미가 있어요. 저는 여성으로서 영화를 만드니까요. 페미니즘을 통해서 제 자신에 대해 많은 걸 깨달았고, 페미니즘 자체에 대해서도 많은 걸 알게 됐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보기엔 충분치 않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한다. 그럼에도 “비록 페미니스트 영화를 만들진 않았지만, 제가 해온 작업들의 결과로 저는 페미니스트가 되었죠.”(118쪽)라고 말한다.

 “저는 열아홉 살 이래로 페미니스트로 살아왔어요. 여성의 권리, 동일 임금, 피임 같은 것들을 위해 싸워왔죠. 아주 일찍부터 시작했어요. 당시 제 주변엔 수많은 페미니스트가 있었어요. 그들은 때로 저를 이용했죠. 때론 저를 밀어내기도 했고요. 때론 제 작품들을 멋대로 해석해 페미니스트 딱지를 붙이기도 하고, 떼어내기도 했죠. 일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제 작품을 싫어했죠.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좋아했고요. 저는 탁구공 신세였죠. 사실 초창기만 해도 페미니스트 관련 서적을 읽지 않았어요. 저는 아주 나중에야 관심을 가졌죠. 하지만 저는 여성에게 불합리하고 해로운 것이라 여겨지면 자연스레 싸움에 뛰어들었어요.” (<아녜스 바르다의 말>, 237쪽)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은 바르다의 <행복>(1964) 같은 작품을 두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르다의 작품을 여성의 눈으로 여성의 삶을 그리지 않았다고 그 누가 섣불리 말할 수 있을까?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세상에 각인시키다시피 한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를 보라. 이 영화는 철저히 여성주의 관점으로 쓰인 영화이다. <클레오>는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한 여성이 카드점을 보면서 시작한다. 금발의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 클레오. 그런데 그녀의 점괘는 매우 좋지 못하다. 점치는 사람조차 사실대로 말하기를 꺼린다. 클레오가 자리를 뜬 뒤에야 말한다. “암으로 죽을 운명”이라고. 사실 클레오는 이날 오전에 의사로부터 좋지 못한 소식을 들은 상태였고, 자세한 결과는 저녁에나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의 시간 ‘5시부터 7시’ 사이의 클레오의 생활을 보여주며 시간 흐름에 따른 생각의 변화를 쫓아간다. 암이라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두려움에 직면한 여성. 그 두려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여성을 그리고 있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Cléo de 5 à 7 / Cléo from 5 to 7)> (1962) 한 장면


바르다가 이 책에서 말하듯이 암 선고를 받기 전까지의 클레오는 자신의 모든 감각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구축한다. “클레오는 그들의 클리셰”인 셈이다. 적당한 키에 아름답고 금발이고 곡선미를 지닌 여성. 그러나 클레오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자신이 인형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다. 남자들에 의해 조종되는 인형, 아무 결정도 스스로 내리지 못하는 작은 여성이었던 이전의 클레오. 그런데 클레오는 죽음을 맞닥뜨리고는 홀로 거리로 나선다. 클레오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그러나 생각은 없고 징징대기 좋아하는 어린애 같은 여성으로 취급하던 그녀의 연인, 피아노 연주자, 조력자 등을 떼어내고 혼자 거리로 나선다. 이제까지 입었던 화려한 옷도, 가발도 벗어버린다. 거리를 거닐면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더 이상 시선의 대상이기를 원치 않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자’하는 주체로서 새롭게 서는 것이다. 영화는 그 눈부시고도 아름다운 순간에 집중한다. 이윽고 누군가를 만나 자신이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게 된다. 바르다가 말하듯이 “클레오에게 이전까지의 남녀 관계는 에로티시즘, 주도권 쟁취를 위한 힘겨루기 사회적 게임 등에 기반할 뿐”이었으나 이제 클레오는 똑같은 인간으로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 영화는 한 젊은 여성의 정체성 찾기를 그렸고, 이건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한 첫걸음에 해당하니까요.”(14쪽)이라고 말한 바르다의 말이 더 깊이 와 닿는다. 카드 점술사가 클레오에게 “죽음은 새로운 탄생”이기도 하다고 말한 것과 일치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면 여성은 언제나 사랑과 연관이 있어요. 사랑에 빠져 있거나 그렇지 않죠. 사랑에 빠진 적이 있거나 앞으로 그럴 예정이죠. 혼자일 경우에도 과거 사랑에 빠졌었거나, 마땅히 사랑에 빠져야 하기에 당장이라도 사랑에 빠지고 싶어 하죠. 반면 남성은 영화에서 다른 지위를 가져요. 직업과 관련한 영화가 있고, 우정을 다룬 영화, 고군분투하며 뭔가에 대항해 싸우는 영화도 있죠. 하지만 여성이 자신의 직업을 갖고 등장하는 영화는 아마 본 적이 없을 거예요. 여성이 의사로 등장하고 수술을 진행하고, 환자들을 상대하는 영화는 관객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예요. 여성이 무언가를 지시하고, 무언가를 해내고,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는 그런 장면들이 나오는 영화도 본 적이 없을 거예요. 여성이 직업을 갖는다면, 대개 데코레이터나 비서 또는 우체국 직원이죠. 직업을 가질 순 있지만, 결코 영화의 주된 요소가 아니에요. 대부분의 영화에서 주요 관심사는 여성의 사랑 이야기예요. 그건 반드시 바뀌어야 해요. (<아녜스 바르다의 말>, 120쪽)


바르다가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시나리오를 쓰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 자신이 여자라서가 아니라 재정적으로 지원받기 어려운 영화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바르다는 영화계에서 여성들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인다. “두 가지 문제가 있어요. 그중 하나는 모든 업계에서 남성과 동등한 수의 여성이 승진해야 한다는 문제고, 다른 하나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여성들이 어떻게 자기가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을지, 그런 여성들이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죠. 제게는 한 가지 해결책밖에 없고, 그건 바로 ‘슈퍼우먼’이 되어 한 번에 몇 가지 삶을 동시에 사는 거예요.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게 그거죠. 한 번에 몇 개의 삶을 살면서 포기하지도, 그중 어느 것도 버리지 않는 거요. 아이들도, 영화도,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 거예요.”(<예술하는 습관>. ‘아녜스 바르다’ 편)

1974년, 독일의 한 방송에서 바르다에게 1년 안에 새 영화를 제작하는 조건으로 전권을 위임했다. 그러나 그때 바르다는 둘째를 출산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경험상 영화 세트장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바르다는 결국 집에서 새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저는 집에 갇혀 있다시피 했죠.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을 집에 갇혀 있다시피 하고 집과 육아에 숨 막혀하는 여성, 그럼에도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했어요.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이런 제약들 속에서 무엇을 이뤄낼 수 있을까? 대부분의 여성은 집안일에 매여 있다는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했어요. 제 자신을 집에 딱 붙여놓고 시작했죠. 그리고 새로운 차원의 탯줄을 상상했어요. 마침 집에 80미터 길이의 비상용 전선이 있었는데, 딱 그 정도의 공간 내에서만 <다게레오타입>을 촬영하기로 결정했어요. 그 공간 내에서 제게 필요한 걸 모두 찾아내고, 그 이상은 절대 탐험에 나서지 않는 거예요.” (<아녜스 바르다의 말>, 136쪽)  이 계획은 성공했다. 바르다는 동네 상인들의 일상을 영화화한 다큐멘터리 <다게레오타입>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바르다의 영화는 그의 작품 중 최고작이라 감히 말할 수 있는 <방랑자>(1985)이다. 우선 이 영화는 ‘상드린 보네르’의 젊은 시절, 그 찬란한 연기를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영화는 한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시작한다. 한 겨울 도랑에서 얼어 죽은 여성. 여성의 이름은 모나(상드린 보네르)이다. 떠돌이, 방랑자였던 모나. 그녀는 어쩌다 이렇게 길 위에서 얼어 죽었을까. <방랑자>는 모나가 길 위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회상 장면들과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진술로 그녀의 짧은 삶을 추적한다.


<방랑자(Sans toit ni loi/Vagabond)> (1985) 한 장면


보기에도 추운 겨울날 한 여성이 차를 잡아타려고 애쓴다. 등 뒤에는 아주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다. 모나의 행색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금세라도 화면 밖으로 모나의 하얀 입김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 모나는 이 길에서 저 길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떠돌며 숲이나 거리 아무 데서나 텐트를 치고 잔다. 먹을 것을 구걸하기도 하고, 하루 노동을 제공해서 번 돈으로 사 먹기도 한다. 줄담배를 피우고 대마초를 사랑하며,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을 좋아한다. 그녀는 대체 왜 이렇게 떠도는 것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 실업계 학교를 나와 한때 비서로 일했지만, 그 일이 하기 싫어서 떠돌고 있고, 그러므로 거리에서도 누군가를 상사로 모시기는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모나는 누구보다 독립적이고 강인하다. 영리하지만 젊은 여성이기에 연약하기도 하다. 누군가는 모나에게서 자유를 보고, 사랑을 보기도 하며, 또 누군가는 잃어버린 청춘을 보기도 하며, 또 누군가는 그녀를 혐오스러운 존재로 경멸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보기도 하며, 그녀를 착취해 돈벌이 대상으로 삼고자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모나는 그 수많은 이들이 권하는 것들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생활방식이나, 자선, 존재 이유, 결혼, 사랑 등에 의문을 제기한다. 자유롭지만 그렇기에 절대 고독한 모나. 모나가 젊은 여성이기에,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기에, 그녀에게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다. 바르다는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기도 한다. “저는 마지막 증언이 모나를 죽인 거라고 판단했어요. 한 여자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엉덩이가 근사하다, 라면 그건 사실상 그 여성을 파멸시키는 거예요. 그게 모나를 죽인 거예요.”(272쪽)

이 영화에서는 모나가 강간당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은 아주 은유적으로 그려진다. 이 책에서 그 장면에 대한 바르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바르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실 영화 속의 모든 폭력성과 선정성은 그저 사내가 여자를 보고 “난 저 여자를 가질 거야”라는 생각을 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다 담겨 있어요. 영화는 그저 암시를 하고, 관객은 그걸 느끼는 거죠. 강간 자체를 보여주는 건 관심사가 아니에요. 제 안에는 윤리적 시스템이 있어서 뭘 보여줄지, 안 보여주지는 정해서 제게 알려줘요. 생생한 폭력 묘사는 그게 강간이 됐든 전쟁 장면이 됐든 또는 폭력을 묘사하는 이유가 사실은 폭력 그 자체를 규탄하기 위해서라고 해명을 하든, 언제나 일정 정도의 쾌감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쾌감을 관객과 나누는 거죠. 저로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걸 용납할 수 없어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게 제 선택이죠. (<아녜스 바르다의 말>, 273쪽)


이렇게 평생 여성의 눈으로 평범한 이들의 삶을 밀도 있게 그려낸 바르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바르다는 노년에 에너지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그러다가 곧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작품만큼은 스스로도 존중한다고 말한다. “제 작품을 칭찬한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싸워서 얻어낸, 싸울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의미로요. 돈도 없이, 힘도 없이, 보답도 없이 늘 투쟁해왔죠. 찾는 사람이 없어 한동안 손을 놓기도 했고요. 사람들은 제가 이런 영화들을 만드는 걸 원치 않아요. 제작비를 지원하지 않아요. 완성된 제 작품엔 박수를 보내면서도 말이죠.”(250쪽) 6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진행된 바르다 인터뷰 모음집인 <아녜스 바르다의 말>은 그 투쟁과도 같았던 삶을 오롯이 담고 있다. 의외의 장소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그의 눈부신 영화들. 이 책은 바르다의 삶과 영화를 다시 바라보고, 추억하고, 기억하게 하는 소중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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