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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Jan 05. 2021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들'을 사랑한 백석

백석, <정본 백석 소설/수필>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언제  읽어도 좋은 시(詩)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펼쳐 읽다가 나는 다시 한번 미소 짓는다. 어쩜 이리도 아름다울까, 눈앞에 선명하게 그 광경이 그려진다. 어디 이 시뿐인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흰  바람벽이 있어’ ‘여우난골족’ 등등 백석에겐 말 그대로 주옥같은 시가 너무도 많다. 그래서 나는 백석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그동안  그의 시(詩) 말고는 다른 작품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백석의 수필과 소설을 접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고 하니, 그저  반가울 뿐이다. 게다가 이 책을 엮은이가 일찍이 <정본 백석 시집>을 펴낸 ‘고형진’이니 더 믿음직스럽다.

책을  펼치고 가장 첫 번째 작품인 ‘해빈수첩海濱手帖’부터 읽는다. 바닷가 마을 풍경을 ‘개’, ‘가마구’, ‘어린아이들’로 나눠  묘사하고 있는데, 그 시각과 묘사하는 언어가 시를 쓰는 백석 그대로이다. 그동안 줄곤 외국 문학 번역서를 읽느라 거의 잊고 지낸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오랜만에 백석의 작품을 읽으면서 새삼 느낀다. 아, 어쩜 이렇게도 좋은가. 역시 백석이구나.



저녁물이  끝난 개들이 하나둘 기슭으로 모입니다. 달 아래서는 개들도 뼉다귀와 새끼 똥아리를 물고 깍지 아니합니다. 행길에서 걷던  걸음걸이를 잊고 마치 밀물의 내음새를 맡는 듯이 제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는 듯이 고개를 쑥- 빼고 머리를 쳐들고 천천히 모래장변을  거닙니다. 그것은 멋이라 없이 칠월 강변의 칠게를 생각게 합니다. 해변의 개들이 이렇게 고요한 시인이 되기는 하늘에 쏘구랑별들이  자리를 바꾸고 먼바다에 뱃불이 물길을 옮는 동안입니다. 
산탁 방성의 개들은 또 무엇에 놀라 짖어내어도 이 기슭에 서 있는  개들은 세상의 일을 동딸이 짖으려 하지 아니합니다. 마치 고된 업고를 떠나지 못하는 족속을 어리석다는 듯이 그리고 그들은 그  소리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듯이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우뚝 서서 고개를 들고 귀를 기울입니다. 그들은 해변의 숭엄한 철인들입니다. 
밤이 들면 물속의 고기들이 숨구막질을 하는 때이니 이때이면 이 기슭의 개들도 든덩의 벌인 배 위에서 숨구막질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일이 끝나도, 언제까지나 바닷가에 우둑하니 서서 주춤거리며 기슭을 떠나려 하지 아니합니다. 저 달이 제집으로 돌아간 뒤에야 올 조금의 들물에게 무슨 이야기나 있는 듯이. (‘해빈수첩’)

어린아이들
바다에 태어난 까닭입니다. 
바다의 주는 옷과 밥으로 잔뼈가 굵은 이 바다의 아이들께는 그들의 어버이가 바다로 나가지 않는 날이 가장 행복된 때입니다. 마음 놓고 모래장변으로 놀러 나올 수 있는 까닭입니다. 
굴깝지 위에 낡은 돗대를 들보로 세운 집을 지키며 바다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자라는 그들은 커서는 바다로 나아가여야 합니다.

바다에 태어난 까닭입니다. 
흐리고  풍랑 센 날 집안에서 여울의 노대를 원망하는 어버이들은 어젯날의 뱃놀이를 폭이 되었다거나 아니 되었다거나 그들에게는 이  바다에서는 서풍 끝이면 으레이 오는 소낙비가 와서 그들의 사랑하는 모래텀과 아끼는 옷을 적시지만 않으면 그만입니다.

밀물이 쎄는 모래장변에서 아이들은 모래성을 쌓고 바다에 싸움을 겁니다. 
물결이 그들의 그 튼튼한 성을 허물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더욱 승승하니 그 작은 조마구들로 바다에 모래를 뿌리고 조약돌을 던집니다. 바다를 시멸시키고야 말 듯이.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두던의 작은 노리가 그들을 부르면 그들은 그렇게도 순하게 그렇게도 헐하게 성을 비우고 싸움을 벌입니다. 
해 질 무리에 그들이 다시 아버지를 따라 기슭에 몽당불을 놓으러 불가로 나올 때면 들물이 성을 헐어버린 뒤이나 그때는 벌써 그들이 옛 성과 옛 싸움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해빈수첩’)


쏘구랑별이니,  산탁, 방성, 동딸이, 숨구막질, 든덩, 조마구, 두던, 노리 등등 아리송한 말들이 많다. 알 듯 모를 듯한 단어를 제 나름으로  상상하면서 죽 읽어 나가면 어느 사이엔가 평화로운 바닷가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러고 나서 이 알 듯 모를 듯한 단어,  그러니까 평안북도나 남도, 강원도 등지의 방언을 엮은이가 친절하게 풀이한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감상하면 시에서 그려내고 있는 그  이미지가 더욱 또렷해진다. 나는 첫 수필에서 이미 마음을 빼앗기고 그 뒤로 죽 읽어 나가다가 ‘편지’라는 수필에서 또 한 번  아, 이게 바로 백석이지 하고 감탄한다. 


이 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닭이 울어서 구신이 제집으로 가고 육보름날이 오겠습니다. 이 좋은 밤에 시꺼먼 잠을 자면 하이얗게 눈썹이  센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육보름이면 옛사람의 인정 같은 고사리의 반가운 맛이 나를 울려도 좋듯이 허연 영감 구신의  호통 같은 이 무서운 말이 이 밤에 내 잠을 쫓아버려도 나는 좋습니다. 고요하니 즐거운 이 밤 초롱초롱 맑게 고인 샘물 같은  눈으로 나는 지금 당신께서 보내주신 맑고 고운 수선화 한 폭을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노라니 그윽한 향기와 새파란 꿈이 안개같이  오르고 또 노란 슬픔이 내냇같이 오릅니다. 나는 이제 이 긴긴밤을 당신께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 (닭이 우나?) 아 닭이 웁니다. 나는 이만 이야기를 그치고 복밥을 기다리는 얼마 아닌 동안 신선과 고사리와  수선화와 병든 내 사람이나 생각하겠습니다. (‘편지’)


음력 열엿셋날을 앞둔 고요하고 즐거운 어느 밤, 초롱초롱한 눈으로 잠들지 않은 채, 고운 수선화 한 폭을 바라보다 그 수선화를 닮은 좋아하는 이를 떠올린다. 그런데 그이를 떠올리다 보니 ‘새파란 꿈이 안개같이 오르고 노란 슬픔이 내냇(연기)같이’ 피어오른다. 그리하여 백석은 그 긴긴밤을 노란 슬픔과 얽힌 이야기를 편지로 풀어 보낸다. 그리움과 슬픔, 안타까움, 그리고 ‘수선화와 병든 내  사람이나 생각’하겠다는 구절에선 왠지 모를 다정다감한 마음까지 느껴진다.

어떤 수필에서는 백석이 평소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알게 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가재미․나귀’같은 수필이 그렇다. 



동해 가까운 거리로 와서 나는 가재미와 가장 친하다. 광어, 문어, 고등어, 평메, 횟대…… 생선이 많지만 모두 한두 끼에 나를  물리게 하고 만다. 그저 한없이 착하고 정다운 가재미만이 흰밥과 빨간 고치장과 함께 가난하고 쓸쓸한 내 상에 한 끼도 빠지지 않고 오른다.

묘지와 뇌옥과 교회당과의 사이에 생명과  죄와 신을 생각하기 좋은 운흥리를 떠나서 오백 년 오래된 이 고을에서도 다 못한 곳 옛날이 헐리지 않은 중리로 왔다. 예서는 물보다 구름이 더 많이 흐르는 성천강이 가까웁고 또 백모관봉의 시허연 눈도 바라보인다. 이곳의 좌우로 긴 회담들이 맞물고 늘어선 좁은 골목이 나는 좋다. 이 골목의 공기는 하이야니 밤꽃의 내음새가 난다. 이 골목을 나는 나귀를 타고 일없이 왔다갔다하고 싶다.  또 예서 한 오 리 되는 학교까지 나귀를 타고 다니고 싶다. 나귀를 한 마리 사기로 했다. (‘가재미․나귀’) 


백석은 가재미도 좋아하고, 나귀도 좋아하는지 ‘가난하고 쓸쓸한’ 밥상에 한 끼도 빠짐없이 가재미를 올린단다. 그리고 밤꽃 내음새가 물씬  나는 골목을 나귀를 타고 어슬렁어슬렁 다니고 싶다고 한다. 그는 이런 대상을 한없이 착하고 정다운 존재라고 말한다. 가재미에  대한 사랑은 시로 읊기도 했는데, ‘선우사(膳友辭)’라는 시가 바로 그 작품이다. 


선우사(膳友辭)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여기서 ‘선우膳友’란 ‘반찬 친구’를 말한다. 가재미 반찬을 친구라고 풀이한 것도 참신하지만 흰밥과 가재미처럼 새하얀 것들을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인상 깊다.  백석의 생김새를 보면 단아하고 곱다. 담백하게 생긴 미남상이랄까. 평소 가재미나, 나귀, 흰 바람벽, 눈이 푹푹 나리는 날의 흰  당나귀, 초생달, 명태, 노루, 짝새, 바구지꽃 등등 소박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를 아끼고 사랑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단풍처럼 화려한 것에는 마음이 쉬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빨간 물 짙게 든 얼굴이 아름답지 않으뇨 빨간 정(情) 무르녹는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뇨. 단풍 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줄댄다. 
어데 청춘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노사(老死)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
재화가 한끝 풍성하여 시월 햇살이 무색하다. 사랑에 한창 익어서 살찐 따몸이 불탄다. 영화의 자랑이 한창 현란해서 청청 하늘이 눈부셔한다. 
시월 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 단풍도 높다란 낭떠러지에 두서너 나무 깨웃듬이 외로이 서서 한들거리는 것이 기로다.
시월 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단풍’ 전문)


이처럼  <정본 백석 소설․수필>에는 백석의 향토적이면서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로 쓰인 수필 열두 편과 소설 네 편을  만날 수 있다. 수필이 시처럼 아름답고 따스하다면 소설은 사뭇 느낌이 다르다. 사실 백석이 처음 문단에 이름을 알린 것은 시가  아니라, 1930년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였다. 이 책에서 바로 그 작품을 볼 수 있는데,  토속적인 평안도 방언으로 마을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문을 이용, 과부와 유부남의 일탈된 성(性 )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도발적이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애잔하다. 그런 이들, 가난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 엿보인다. 이런  경향은 ‘마을의 유화遺話’에서도 이어져 가난한 어느 노부부의 애환을 쓸쓸하지만 연민 어린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닭을 채인  이야기’는 동물과 무생물을 의인화해 마치 한 편의 동화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수필도 소설도 작품 수가 많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한편, 백석의 시에서 그러했듯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들을 사랑했던 그의 면모를 또다시 확인할 수 있어  왠지 내 마음도 나리는 저 흰 눈처럼 깨끗해지는 그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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