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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Jan 26. 2021

연대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보라

앨리스 워커, <컬러 퍼플>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으나 절판된 책이라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컬러 퍼플>이 지난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명성은 익히 들었으니, 세계문학전집에 들어가고도 남을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읽기를 마친 후에는 그래, 당연하지 하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이런 작품이  고전으로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책이 들어가겠는가.

서간체로  이루어졌는지도, 또 이렇게 잘 읽히는 책인 줄도 몰랐다. 그렇다. <컬러 퍼플>은 흡인력이 상당해서 좀처럼 책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뜻밖에도 재미가 있어서 며칠 만에 읽기를 마쳤다. ‘재미’라는 말은 어쩌면 모순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스토리는 흥미진진하지만 사실 이 책은 읽기에는 고통스럽다. 당신이 여성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첫 시작부터 끔찍하다. 열네 살 셀리는 아픈 엄마를 대신해 아버지에게 강간당한다. 휴.... (책을 읽으면서도 괴로웠는데, 이 글을 쓰면서도 또 한 번 고통의  한숨을 내쉰다). ‘대신한다’는 말도 모순이 있는데, 몸이 아픈 엄마가 부부 관계를 거절하자 아버지가 엄마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열네 살 밖에 안 된 딸을 강간하는 것이다. 엄마가 아프니까 너라도 해야 한다고.

그 후로 아버지의 강간은 습관적으로 일어나고 셀리는 임신하게 되고 아이까지 낳는 지경에 이른다. 자기 자식이자 동생인 아이들을 셀리의 아버지는 태어나자마자 누군가에게 줘버린다.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도 자기 죄의 씨앗은 차마 마주 보기 힘들었는가 싶기도 하다. 그 사이 아픈 엄마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이 인간 말종은 이제 셀리가 아닌 셀리의 여동생 네티를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한다. 셀리는 네티도 그런 일을 겪을까 봐 불안하기만 하다. 동생은 지켜주고 싶다. 셀리에 비해 네티는 예쁘고 영리하고 똑똑하다. 그런 동생이 아버지의 손에 유린당할까 셀리는 그저 좌불안석.

네티를 탐내는 사람은 또 있다. 셀리가 이 작품에서 늘 00 씨라고 부르는 앨버트가 그러하다. 앨버트는 셀리의 아버지를 찾아와 네티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단칼에 거절한다. 네티는 절대 안 된다고. 자기가 차지할 속셈이기 때문에 그러하리라. 휴....( 여기서 또 한 번 한숨과 온갖 육두문자를 중얼거린다). 대신 저 못생긴 애를 데려가라면서 셀리를 가리킨다. 얼굴은 못생겼지만 일을 잘하고, 애를 잘 돌본다는 것이다. 앨버트는 애들을 잘 돌본다는 말에 이제 스물이 된 셀리를 가축처럼 데리고  간다. 그는 애가 넷이나 딸린 홀아비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셀리는 짐승 같은 아버지 손을 벗어나 또 다른 짐승인 남편의 손으로  넘겨진 것이다. 셀리의 지옥과도 같은 삶은 끝날 줄 모른다. 그 사이 네티는 자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아버지와 형부를 피해  달아난다. 

이렇게 <컬러 퍼플>은 셀리가 처음에는 하느님에게 보낸 편지로, 그러다가 어느 순간 헤어진 동생 네티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루어진다. 셀리와 네티는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이 폭력적인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셀리는 온전히 한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증을 일으키며 이 작품은 자매의 고통스러운 삶을 몇십 년에 걸쳐 보여준다. 여기에 또 다른 여성들, 셀리의 며느리인 ‘소피아’, 앨버트의 애인이었던, 그리고 아직까지도 앨버트가 사랑하는 ‘슈그’, ‘올리비아’, ‘타시’ 등등 또 다른 흑인 여성들의 삶이 겹쳐지면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흑인 여성들이 싸우고 연대하고 살아남는 과정을 고통스럽지만 감동적으로 그려나간다.

나는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는 <컬러 퍼플>은 ‘색깔’, 그러니까 흑백갈등에, 인종차별에 더 중점을 둔 작품이 아닐까 싶었는데, 이 책은 사실 성차별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남편’으로 이루어진 폭력적인 가부장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몇몇 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가부장제 아래서 신음하며 살아간다. 남자인 앨버트나 그의 아들 하포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 또한 가부장제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순종적이고 자기 목소리라고는 조금도 낼 수 없었던, 그저 착하기만 한, 어리숙한 주인공 셀리는 그 누구보다 가부장제의 희생양이다.  아버지로부터 남편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강간과 구타가 그녀의 일상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은 몹시 고통스럽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이 그렇게 순응하면서 살아가지는 않는다. 셀리가 그토록 사랑한 동생 네티는 언니와 달리 똑똑했고 공부를 멈추지 않아 자기만의 목소리와 생각을 지녔고, 그렇기에 언니에게 늘 “싸워야 해.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셀리는 하느님에게 보내는  편지에 ‘저는 싸우는 법을 몰라요. 제가 아는 거라곤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법뿐’이라고 고백할 뿐이다. 그럼에도 자꾸 사람들은, 아니 셀리 주변 여성들은 그녀에게 싸우라고 말한다. “셀리 식구들하고 싸워야 해. 내가 대신해줄 수는 없어. 스스로 싸워야 해.”  심지어 앨버트의 아들 하포가 결혼한 ‘소피아’도 시어머니인 셀리에게 싸우라고 말한다. 매를 맞는 데 익숙해져서 ‘지상이 삶은  금방 끝나고 천국은 영원하다’ 말하는 셀리에게 소피아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님 머리부터 깨버리세요. 천국은 나중에 생각하고요.”(72쪽)


저는 평생 동안 싸워왔어요. 저는 아빠하고 싸워야 했어요. 남자 형제들하고도 싸워야 했고요. 사촌들, 삼촌들하고도 싸워야 했어요. 남자들이 많은 집안에서 여자애는 안전하지 않아요. 하지만 내 집에서도 싸워야 할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숨을 훅 내쉬웠어요. 저는 하포를 사랑해요. 그녀가 말했어요. 그건 정말이에요. 하지만 하포에게 맞고 사느니 그를 죽여 버리겠어요. (<컬러  퍼플>, 70쪽)


이렇게 주변의 당찬 여성들이 셀리에게 남편과 남편의 자식들에 맞서 싸우라고 요구해도 순종적인 셀리가 쉽사리 변하기는 어렵다. 싸우고 달아났지만 네티가 목숨을 잃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지, 순종적으로 시키는 대로 하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자신이 차라리 나은 게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바보 같은 여자를 서서히 변화시키는 것은 놀랍게도 남편 앨버트가 사랑하는 여자  ‘슈그’이다. 병든 슈그가 앨버트와 함께 셀리의 집으로 오면서 셋이 한 집에 사는 기이한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런 상황보다도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더 기묘하다. 남편 앨버트처럼 셀리도 슈그를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슈그 또한 셀리를 처음에는 무시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셀리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녀를 저 자연의 위대한 색인 ‘보라빛’으로 물들이는 데 앞장서게 된다.

처음에는 남편의 애인을 사랑하는 셀리의 마음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동경인가 아니면 너무나도 노예 같은 삶을 살아왔기에 그런 처지에 익숙해졌나 싶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어리숙했고, 나날이 힘겹게 살아가느라 자신의 정체성 같은 것을 조금도 생각해 볼 틈이  없던 한 여인이 직접 부딪히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런 자신의 정체성을 뒤늦게나마 깨닫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리고 그런 사랑으로 자신도 저 들판을 물들인 아름다운 자연의 색깔처럼 또 하나의 아름다운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과정은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다. 


어쨌건  내가 기도하고 편지를 썼던 신은 남자야. 내가 아는 다른 남자들하고 똑같이 행동해. 찌질하고 게으르고 비열하지. 그 남자가  불쌍한 흑인 여자의 말에 한번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세상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거야.(<컬러 퍼플>, 255쪽)


백인 남성의 모습을 한 신. 그런 신은 셀리가 아무리 간절히 편지를 써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셀리는 이 끔찍한 삶을 저주하면서 신을 모독했다. 그러나 슈그는 다정히 속삭인다. 신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그것’ 일뿐이라고 이 세상 모든 만물이라고. 좋은 걸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며, 그렇기에 ‘우리가 보랏빛 일렁이는 어느 들판을 지나가면서도 그걸 알아보지 못하면 신은 화’(260쪽)를 낼 것이라고. 아마 그즈음부터 셀리는 하느님에게 편지 쓰기를 그만두고 동생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남자, 그러니까 신을 신경 쓰느라 신이 만든 세상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 남자 대신 꽃, 바람, 물, 바위를 생각하는 셀리. 그리고 셀리는 이제 남편에 맞서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다. 그 장면은 얼마나 통쾌한가.


나는 가난하고, 흑인이고, 못생겼고, 요리도 못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 세상 만물에게 어떤 목소리가 말했어. 하지만 나는 여기 살아 있어. (<컬러 퍼플>, 273쪽)


<컬러 퍼플>은 처음에는 읽기 고통스러운 책이다. 셀리의 삶 자체가 줄곧 그러했기에. 그러나 누군가와 마음으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다. 살아남는다. 삶을 바꿀 수 있다. 셀리의 인생이 증명한다. ‘비난에 맞서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자기 인생을 살 수 없다’는 소피아의 말은 셀리뿐만 아니라, 네티, 소피아, 슈그, 애그니스, 올리비아, 타시 등등 이 세상 모든 여성에게 유효하다. 여성이여, 흑인이여, 싸우고, 연대해서 살아남으라. 그리고 더 소리 높여 목소리를 내라.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쓰인 이 책은 그렇게 강렬하게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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