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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Jan 27. 2021

천재적인 희곡 두 작품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뒤렌마트 희곡선-노부인의 방문, 물리학자들>


지난 일요일에 누운 채로 느슨하게 이 책을 읽다가 중간에 벌떡  일어났다. 흥미롭고 놀라웠다. 《뒤렌마트 희곡선》에는 <노부인의 방문>, <물리학자들> 두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작품인 <노부인의 방문>을  읽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극의 설정 자체에 감탄했다. ‘노부인’ 캐릭터도 강렬하다. 큭큭 곳곳에서 웃음도 터진다. 처음에는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참 섬뜩해진다. 그러고는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몰락한 소도시 귈렌, 이곳은 쇠락할 대로 쇠락해서 기차도 그냥 지나친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마을에 평소에는 정차하지 않는 특급 열차가 멈춰 선다. 이유는 오직 하나 노부인 ‘클레어 자하나시안’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온 세계가 주목하는 대부호이다. 이  노부인이 왜 이 마을을 찾았느냐고? 사실 귈렌은 그녀가 태어나고 10대 시절을 보낸 곳이다. 클레어, 이 노부인은 45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을 찾은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귈렌 시는 파산 직전이다. 그런데 세계적인 대부호가 된 클레어가 고향을 찾는다니,  이 노부인으로부터 한몫 단단히 챙기길 기대하는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환대하기 위해 대대적인 행사를 계획하고, 시민 대표로 시장,  고등학교 교장, 목사, 의사, 경찰 등이 역 앞에 몰려나온다.

여기까지는 조금 평범(?)한 설정이다. 이 성공한 노부인은 늘그막에 이르러 고향이 그리워서 찾아왔고, 순박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녀의  돈을 노리고 벌떼처럼 달려든 마을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게 아닐까 예상하기 쉽다. 그러나 이 노부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열차가 서지 않는 귈렌에 특급 열차를 강제로 세우는 모습부터 예사롭지 않다. 승무원은 막무가내로 기차를 세우는 클레어에게  항의한다. 그러나 노부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내가 누군 줄 알아? 나 ‘클레어 자하나시안’이야! 그 한마디에 승무원의  태도는 확 변한다. 몰라 뵈었다면서 이곳에서 열차를 세우는 건 지당하고 또 지당하십니다, 굽실굽실. 땅콩회항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부인은 그렇게 부자라면서 왜 열차를 타고 왔을까? 자기 차 없어? 의문이 드는데, 이윽고 역으로 마중 나온 이들을 통해  클레어의 비밀 아닌 비밀이 드러난다. 사실 그녀는 자동차 사고를 당해, 의족을 한 상태이고 그래서 그 뒤로는 기차만 타고 다닌다는 것이다. 거의 온몸이 의족 상태인 것처럼 차디차다. 노부인과 오늘 함께 귈렌을 찾은 사람은 무려 그녀의 일곱 번째 남편이다. ‘오늘’이라고 말한 까닭은, 이 극에서도 클레어는 계속 남편을 갈아치우기 때문이다. 더 재미난 것은 사람들에게 남편을 소개할 때이다. “일곱 번째 남편을 소개할게요. 모비 이리와요. 사실 진짜 이름은 페드로예요. 하지만 모비가 더 나아서요. 집사 이름인  보비와도 잘 어울리고요. 어쨌든 집사는 평생 필요하니 남편들이 집사 이름에 맞춰야죠.” 집사는 평생 필요하니까 남편들이 집사 이름에 맞추라고 하다니, 껄껄 웃음이 나오면서 한편으로는 뭔가 통쾌하다.

사고를 당한 후로 클레어는 가마로만 움직인다. 열차에서 내린 그녀를 위해 ‘로비’와 ‘토비’ 두 가마꾼이 달려온다. 이들은 맨해튼 출신의 갱 단원들로 사형 선고를 받고 뉴욕의 싱싱 감옥에 갇혀 있던 것을 클레어가 손을 써서 빼냈다. 한 사람당 100만 달러를 주고 오직 가마꾼으로 쓰려고 말이다. 이들이 그럴 가치가 있었는지는 이 극을 보면 알 수 있다. 클레어가 타고 다니는 가마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던 것으로 프랑스 대통령이 선물했다. 이런 설정들이 묘하게 뒤틀린 웃음을 준다. 그런데 클레어가 호텔로 옮겨간 뒤 그녀 뒤를 따르는 무언가가 보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장례식에 쓰이는 ‘관’이 아닌가? 이 관은 대체 무엇이며, 클레어는 왜  관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왔을까? 마을 사람들도 궁금하지만, 독자도 궁금해진다. 이 관은 <노부인의 방문>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윽고 벌어진 환영식에서 시장은 클레어에 관해 재빨리 입수한 정보를 갖고 작성한 연설문을 읊는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그의 연설에 따르면 지난날 클레어는 가난하고 늙은 과부에게 식량을 마련해 준 적이 있다. 자신이 힘들게 번 돈으로 감자를 사서 굶어 죽게 된 과부를 살린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붉은 곱슬머리 말괄량이는 이제 이 세상을 선행으로 넘치게 하는 부인이 되었다. 클레어는 수많은 여성  요양소, 무료 급식소, 예술가 원조 기금, 탁아소들을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입 발린 찬사가 끝나고 노부인은 흡족해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다. 클레어는 별다른 감흥 없는 얼굴로 시장의 연설에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다. 


클레어  : 나는 시장의 연설에 나온 아이와는 좀 달랐어요. 학교에선 매를 맞았고, 과부 볼에게 주었던 감자는 훔친 것이었죠. 일 씨와  함께 말이에요. 그 뚜쟁이가 굶어 죽을까 봐 그랬던 게 아니라 일 씨와 잘 침대가 필요했던 겁니다. 숲이나 페터네 헛간보다 침대가  편했거든요. 하지만 여러분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해 즉시 공표하기로 하죠. 나는 귈렌에 10억을 제공할 용의가 있어요. 5억은 시에  기부하고, 나머지 5억은 귈렌의 각 가정에 분배하겠어요.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여러분에게 10억을 주고 정의를  사겠습니다. 나는 정의를 원해요. 10억짜리 정의를  (<노부인의 방문>, 47~48쪽)


학교에서는 매를 맞았고, 연인과 함께 하룻밤 잘 침대가 필요해 훔친 감자를 이웃에게 주었던 지난날의 클레어. 그녀는 수많은 재산을 가진 대부호답게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은지, 자기의 치부마저도 별 부끄러움 없이 밝힌다. 그러면서 귈렌 시에 10억을 제공하겠단다. 시에 5억을, 각 가정마다 5억을 나눠주겠단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정의’를 사겠다는 것이다. 과연 그녀가 말하는 정의란 무엇이며, 그녀는 이 10억으로 ‘정의’를 살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클레어가 내건 ‘그 조건’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클레어의 이 제안 후,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사치스러워진다. 여자들은 외모를 꾸미고 남자들도 멋지게 차려입고, 다들  빚을 내서 평소에는 사지 못했던 물건들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마치 5억이 벌써 분배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괴테가 이곳에서  머물렀고, 브람스가 사중주곡을 만든 인문주의 전통을 지닌 귈렌 시는 클레어의 10억 제안에 서서히 무너져 간다. 교장의 말대로 ‘유혹은 너무 크고 우리의 가난은 너무 혹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귈렌 시의 이 몰락은 원래 그렇지 않은 마을이 돈 앞에서  무너져 가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본성이 애초부터 그렇게 물질 앞에서는 한없이 이기적인 것일까. 쉽사리 판단하기 어렵다.  뒤렌마트는 10억과 ‘정의’ 실현이라는 발칙한 제안으로 인간성과 공동체, 정의와 자본의 문제를 질문한다.



클레어  : 인간성이란 말입니다. 신사 양반들, 부호들의 돈주머니에나 적당한 겁니다. 내가 가진 재력이 세상 질서를 만들어 내지. 세상이  날 창녀로 만들었으니, 이제 내가 세상을 유곽으로 만들겠어요.  (<노부인의 방문>, 100쪽)



두 번째 작품인 <물리학자들>의 배경은 어느 요양소이다. 이곳은 사실 정신 병원이나 마찬가지로 정신질환을 앓는 고위층 인사들을 수용하고 있다. 이중 특별한 병동이 있는데, 이곳에는 과대망상증이나 정신분열증에 걸린 물리학자 세 명이 격리 수용되고  있다. 한 사람은 자신이 뉴턴이라고 생각해서 18세기 초 복장으로 그 시절처럼 가발을 쓰고 지낸다. 또 다른 사람은 스스로 아인슈타인이라고 생각하며 틈이 날 때마다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나머지 한 명인 주인공 ‘뫼비우스’는 솔로몬 왕이 나타나 우주의  비밀을 계시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만든 상상의 세계 속에 틀어박혀 살아간다. 이 병원 의사인 찬트 박사는 이  물리학자들이 온순하고 말썽 부리지 않는 환자들이라고 보증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 희곡은 뜻하지 않은 살인 사건과 그 사건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반전 등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면서, 사회 속의 개인이라는 철학적 질문과 함께  기괴한 상황 설정을 통해 섬뜩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정신 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흔히 그렇듯이 병원 안에 갇힌 자들이 비정상인지, 아니면 병원 밖  세상이 비정상인지 질문하기도 한다. 

이 물리학자들은 모두 같은 목표를 갖고 있지만 전략이 다를 뿐이다. 한 사람의 목표는 물리학의 발전이다. 그는 물리학의 자유를  보존하려고 하지만 물리학의 책임은 부인한다. 반대로 또 다른 사람은 특정한 나라의 권력 정치에 대한 책임이란 명목으로 물리학에  의무를 지운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자신의 이론의 위험성을 깨닫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신 병원에 유폐시켰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세 사람의 대비를 통해 이 작품은 과학 기술 발전과 그에 대한 인류의 책임 문제를 질문한다. <뒤렌마트 희곡선>의  두 작품은 모두 풍자와 해학이 넘쳐나 흥미롭게 읽힌다. 그로테스크한 설정으로 인해 ‘저게 말이 돼?’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폭주하는 자본과 과학 앞에서 개인의 양심과 정의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 빛나는 작품은 날카롭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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