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잠자냥 Jan 30. 2021

이성과 감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SF

한나 렌,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마음을 내 생각대로 다스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고통도 상처도 받지  않는다면, 이 세계에 모든 불화와 다툼, 전쟁이 사라진다면 그런 ‘매끄러운 세계’는 정말 행복하기만 할까? 한나 렌의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은 첫 문장부터 아리송하다. “찌는 듯한 더위에 잠이 깨, 커튼을 열고 창밖으로 눈  풍경을 바라보았다”라는 이상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고생 ‘하즈키’는 등교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아버지와 함께 아침을 먹는다. 그런데 집을 나서는 하즈키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아버지 기일이니까 일찍 들어와.” 그제야 하즈키는 아,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지 벌써 4년 지났지 한다. 대체 무슨 소리야? 이 아이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해졌나? 현실과  꿈이 뒤섞인 세계인가? 알쏭달쏭하기만 한데, 하즈키가 학교로 가는 길은 더 가관이다. 30도 가까운 열기에 달궈진 아스팔트인데  벚꽃이 흐드러지고, 중간부터는 길가의 철 이른 낙엽이 바스락거리고, 얼어붙은 수면이 공존하는 세계. 수업 중 창 밖을 보니 더운데  눈이 내리고 있다. 기상이변인가?

아, 이곳은 무한한 평행 세계를 의식만으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승각’이라는 독자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무한대 현실’에서  마음에 드는 현실을 선택해 넘나들 수 있다. “할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묻고 싶은 얘기가 아직 남았어.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 현실로 가자.”라는 대화가 당연하다는 듯이 오가며, 회피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즉시 다른 시공간의 자신에게로 옮겨갈 수 있다. 팔다리를 다치든. 시각이나 청각, 혹여 가족을 잃어도, 이곳에선 사는 세계를 슬쩍 바꾸면 그만이다. 괴로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고,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즈키가 죽은 아버지와 아침상을 즐겁게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지 않은 세계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 ‘매끄러운 세계’ 사람들은 모두 절대적인 이상향에서 살고 있다. 고통이나  슬픔을 느껴도 그것들이 없애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실제로도 언제든 그 가능성을 이룰 수 있다.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받는 현실로 가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원하면 그것을 이룬 현실로 옮겨가면 된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매끄러운 세계’에도 ‘적’은 있다. 하즈키의 학교로 전학 온  ‘마코토’는 매끄러운 세계에 사는 여느 사람들과 달리 반항적이면서도 부정적인 기운을 내뿜는다. 분명히 하즈키와 어린 시절  친구였는데 마코토는 싸늘하게 모르는 척, 냉정하기만 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알고 보니 마코토는 사고를 당해 다른  ‘일반인’들과는 달리, 오직 하나의 현실만을 평생 살아가야만 하는 ‘승각장애’를 갖게 되었다. 이 장애가 있으면 모든 도망이  불가능하다. 승각장애자의 세계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확률이 낮은 어떤 가능성이 실현된 현실을 인식할 수  없기에 한 여름에 눈을 보기 어렵고 벽을 통과하는 일은 말도 안 된다. 지금까지 그런 능력이 있었던 인간에게는 괴로운 일일  것이다. 하즈키는 그제야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이 평화로운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잔인하기 짝이 없을 수 있음을. 

‘인생에  옆길도 샛길도 없다’는 승각장애를 지닌 마코토에게는 또 하나의 엄청난 공포가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내가 있는 쪽으로 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 전에는 평범한 이 세계의 일원이었던 마코토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유한한 생명도 유한한 가능성도 아니다. 자신들을 계속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는, 아마도 이 세계의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 현실이다. “달리기도 인생도 이젠 나 혼자 해쳐나갈 생각이야. 나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니까.”(52쪽)이라는 마코토의 말은 그래서 애잔하다. 이 절대 고독에 놓인 마코토를 위해 손을  내민 하즈키는 과연 마코토를 구원할 수 있을까?

<미아하에게  건네는 권총>과 <홀리 아이언 메이든>은 인간의 감정을 조작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린다.  <미아하에게 건네는 권총>의 세계에서는 뇌 조작을 통해 인간에게 불멸의 사랑을 선사한다. 이곳에서는 언젠가 서로 사랑이  식어갈 것을 두려워하는 커플이 영원한 사랑을 위해 임플랜트로 자신들의 감정을 조정할 수 있다. 특정 인간을 영원히 사랑하기 위한  장치인 총 ‘웨딩나이프’의 발명으로, 과학은 흔들림 없는 사랑, 불멸의 사랑을 인간에게 선사한다. 배우자에 대한 사랑, 자식, 이웃에 대한 사랑 등등 반응 회로는 다양하다. 이 기술의 응용으로 인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사랑이 깃든 가슴으로 마주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결혼을 앞둔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 웨딩나이프로 서로에게 총을 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영원한 사랑을 거부하는 이는  동반자로 선택할 수 없다’는 사상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다. 만일 이런 총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떨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이 총을 쏠까? 나도 총에 맞기를 주저하지 않을까? 그렇게 뇌 조작을 통해 박제화한 사랑, 감정은 진짜  감정일까?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사랑의 화살을 쏘는 큐피드가 떠오르기도 한다. 큐피드의 화살을 맞으면 누구나 눈앞의 상대에게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 사랑은 진짜 감정일까? 조작된 감정은 아닐까?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질투나 의심, 권태 등등의 부정적인 감정도 따르기 마련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컨트롤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랑이 계속 유지되든지, 아니면 끝나든지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웨딩나이프’는 애정의 방향을 영원히 식지 않는 한 방향으로만 고정시킴으로써 다른 감정이 생겨날 가능성, 그런  인격들을 사전에 모두 차단한다. 이 사랑을 과연 진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홀리 아이언 메이든>의 세계에서는  한번 포옹만으로 증오와 미움을 가진 사람들도 모두 올바른 심성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 포옹을 받고 올바른 심성을 가진 인간이  된다 하더라도 그 올바름이 과연 나 자신의 것일까? 게다가 자기가 가진 힘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면,  그래서 세계의 대부분을 나에게 찬동하는 올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들로 만들 수 있다면 과연 나는 그런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마지막 작품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는 우리나라 독자라면 쉽게 읽어 넘기기 어려울 작품인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즐겁게  읽어나가다가 마지막 작품에서는 예상치 못한 타격을 받았다. 한 고등학교 졸업식 장면이 그려진다. 그런데 그해 졸업생은 이상하게도 단  두 사람뿐이다. 기노카미 사립 고등학교 제47기 학생들은 3년 전 4학급 117명으로 입학했는데, 오늘 1학급 2명으로 졸업식을 치르는 것이다. 이때부터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러다가 “47기 졸업생 여러분을 엄습한 것은 역사상 초유의 재해였습니다. 거기에  휘말리지 않은 두 학생도, 학부모 여러분도 아직 받아들이기 힘드시리라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세월은 흐르고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여전히 그날에 갇힌 채 시간이 멈춰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부디 우리 어른들이 결코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라는  졸업식 축사에서는 그만 울컥해진다.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졸업생석에 앉을 예정이었던 친구들 2학년 D반, 115명은 끝내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체 이 고등학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역사상 초유의 재해’란 무엇일까?

모든 학생들은 현재, 인솔 교사와 함께 수학여행을 갔던 도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최근 600여 일  동안’이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그들은 아직도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신칸센이 갑자기 멈춰버렸다. 열차만  멈춘 것이 아니라 그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도, 열차가 멈춘 순간 하던 동작 그대로 모두가 멈췄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다가 멈춘 아이, 게임을 하다가 멈춘 아이, 웃다가 그대로 멈춘 아이 등등. 이 기묘한 사건을 조사하다가 사람들은 신칸센이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열차 안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열차가 움직이기는 한다. 다만 열차 안의 시간이 1초 경과하는데, 밖의 시간으로 약 2600만초가 필요하다. 그 안의 시간은 밖의 시간의 약 2600만 분의 1로 열차 안의 인간은 그  속도로 생각하고, 숨 쉬고, 땀 흘리며 평상시처럼 살아간다. 열차의 현재 위치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결론적으로 이 열차는 다음  정차역인 나고야 역에 반드시 도착한다. 서기 4700년 무렵에.

그러니까 그날, 수학여행을 떠나지 못한 다른 두 명의 학생이 사건이 발생한 지 600여 일이 지나, 졸업식을 하기에 이르렀을 때도 그 열차 속  아이들은 아주아주 느리게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나라에서는 신칸센을 움직여 보려고 온갖 수를 다 써보지만 열차는 꿈쩍도 하지  않고, 열차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세월은 흘러 졸업식을 치른 두 학생은 어른으로 자라, 사회인이 되어간다. 언론과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았다가, 제 나름대로 ‘소비’하고 그러다가 점점 잊어간다.  이제는 국가 공무원들이 이 열차가 그간 얼마나 움직였는지 그 너무도 미진한 속도를 형식적으로 기록할 뿐이다. 그럼에도 그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가족들, 나라에서 ‘유족’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아이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아이들은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돌아오더라도 가족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일 텐데. 이 기다림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는 저속화된 신칸센을 가정하고 이를 둘러싼 두 가지 의문, 왜 두 학생은 저속화된 신칸센에 탑승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저속화된 신칸센에 갇힌 사람들을 어떻게 구해낼 것인지를 풀어나간다.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감정도, 현실도 마음대로 통제해서 평화롭고 행복하게만 살아갈 수 있는 너무나 매끄러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나 그곳에는 당연하게도 그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또는 스스로 거부하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싸우고,  자기가 처한 조건을 제 자신이 지배하려고 애쓴다. 설령 그로 인해 더 나쁜 소멸의 길을 거치게 된다 하더라도 그 또한 인간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행동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 행동의 동기는 ‘나의 행복’이 아닌 ‘너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물론 그건  결국 나의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이 된다. 사실《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여러 의미에서 내게는 가까이하기 먼 당신이었다.  나는 SF라는 장르를 그리 즐기지도 않고, 이 책은 표지가 전하는 느낌도, 현대 일본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도, 심지어  정세랑이나 천선란의 극찬에 가까운 추천사도 내게는 전혀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한번 읽어보고 싶었고,  읽기를 마친 지금은, 그 모든 ‘편견’에 가까운 꺼려지는 이유들을 제쳐두고 읽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SF는 현실 세계를 빗대어 인간이 살기 좋은 세상은 어떤 세계인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하곤 하는데, 이 책 또한 그렇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은 하나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