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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Feb 02. 2021

스콧을 잃고 젤다를 얻다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 <젤다-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소설과 산문>


《젤다》의 표지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젤다’의 이름 뒤에  그녀의 결혼 뒤 성(姓)인 피츠제럴드가 희미하게 지워졌다. 젤다 피츠제럴드. 그녀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이다. 많은 이들이 젤다를 피츠제럴드의 아내, 그러나 스콧에게 그다지 긍정적인 영향은 주지 못한 여인으로 기억한다. 나 또한 그랬다. 피츠제럴드 부부의 삶을 다루거나 그들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젤다로 유추할 수 있는 인물은 늘 부정적이었다. 이들과 가깝게 지낸 헤밍웨이는 또 어떤가, 그는 ‘젤다’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 파리에서  머물던 몇 년 동안의 기록을 담은 에세이집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노라면 젤다는 한마디로 끔찍한 여자이다. 언제나 방탕하게  돈을 쓰고, 줄곧 징징대며, 파티에 취해 스콧의 삶을 망치고 결국 그의 창작력을 갉아먹는 존재로 그려진다. 물론 헤밍웨이는 치졸하게도 스콧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묘사를 멈추지 못한다. 아마도 자신보다는 일찌감치 인정받고 성공한 스콧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헤밍웨이의 글은 이 부부에게 애정이 있는 듯 꾸미고 있지만 사실,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저열하기  그지없는 질투 또는 시기심 같은 게 느껴진다.

이런  이유로 나 또한 이제까지는 ‘젤다 피츠제럴드’를 그런 사람으로 봤다.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성공한 남편 덕분에 편하게 살면서도 그의 창작력을 갉아먹는,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여인. 그러나 매력만큼은 다분해서 스콧을 미치게 만들고, 스콧이 그녀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어떤 면에서는 귀여운 팜 파탈 같은 여자로 생각했다. 한편, 스콧의 단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주인공 캐릭터는 젤다를 묘사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관된다(실제로 스콧은 젤다의 모습에서 자신의 여주인공들을 창조해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이 책《젤다》가 출간됐을 때 조금 놀라웠다. 젤다 피츠제럴드도 소설과 산문을 썼다고? 정말? 하는 심정. 어떤 작품을 썼을지  호기심에서 책 소개 페이지를 읽어봤다. 아주 잠시 접한 내용임에도 가히 충격적이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가 그러했듯이 젤다 또한 작가인 남편에게 얼마쯤 재능을 ‘착취’당하고 있던 것이다. 

《젤다》를 읽는다. 이 책의 앞부분은 그녀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다. ‘어?’ 하고 다시 한번 놀란다. 입맛이 씁쓸하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읽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무언가가 일어난다. 낭만적이고 아름다우며 쓸쓸하고 애잔한, 그러면서도 재기발랄한 그런 글들. 젤다 피츠제럴드의 글 또한 그렇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스콧은 이야기를 엮어가는 능력 또한 대단한데, 그에 비해 젤다는 스토리보다는 묘사에 탁월하다고나 할까. 이런 표현을 쓸 수도 있구나, 이렇게 장면을 그릴 수도 있구나, 감탄스러운 대목이 종종 눈에 띈다. 그런데 전체적인 느낌은 스콧의 작품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혼란스러웠다.  젤다가 스콧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일까? 아니면 스콧이 젤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이 둘은 애초에 완전한 소울메이트라 작품마저도 이토록 닮은 것일까?

책을 읽노라면 조금씩 진실을 알게 된다. 스콧은 아내 젤다를 소유하려 애썼고, 그녀의 재능마저 갈취했다. 내가 좋아했던 스콧 피츠제럴드의 낭만과 애수, 위트 그 모든 것들이(아니, 모두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많은 것들이 타인의 재능을 착취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씁쓸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책을 통해 젤다를 발견한 기쁨보다도, 그녀를 새롭게 알게 된 사실보다도 이런 씁쓸함이 더욱 컸다. 그럴 만큼 나는 스콧의 수많은 단편과 몇몇 장편을 아끼고 좋아했다. 지금도 책꽂이에는 아직  읽지 않은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문제의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을 비롯해, 이런저런 책들을 바라보는 심경은 당혹감 그 자체이다. 앞으로 내가 이 작품들을 읽는다면, 예전처럼 감탄하면서 읽을 수 있을까? 예전처럼 좋아할 수 있을까?  많은 작품들을 ‘피츠제럴드 부부 공저’로 생각하고 읽어야 하는 건 아닐까.

젤다의 에세이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에는 이런 구절이 엿보인다. 스콧의 작품인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서평이다. 젤다 전체적으로 이 책을 칭찬한다. 그런데 이런 구절을 보라. ‘어떤 페이지에선 결혼 직후 불가사의하게 사라진 제  옛날 일기의 일부가 보여요. 꽤 편집되어 있지만 편지글들에서도 어쩐지 낯익은 내용이 있고요. 아무래도 피츠제럴드 씨는 표절은 집안에서 시작된다고 믿나봐요.’(《젤다》, 118쪽). 스콧의 재능 도둑질(?)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에세이  <F씨 부부를 방으로 모시겠습니다>에서는 이런 구절이 보인다. ‘우리가 날밤을 세우며 단편을 마무리하던 웨스트포트의 하숙집 근처에서는 동틀 때에 라일락이 피었다.’(《젤다》, 155쪽), <경매>라는 에세이에서는 ‘지난 15년간 우리가 글로 어렵게 벌어서 말로 쉽게 써 버린 40만 달러가 남긴 물리적 잔재들. 이것들을 결국 모두 이렇게 간직하게 되는군요.’(《젤다》, 201쪽)라는 구절도 볼 수 있다. 젤다는 ‘내’가 썼다고 하지 않고 ‘스콧’이 썼다고도 하지 않는다.  줄곧 ‘우리’가 썼다고 말한다(스콧은 젤다의 <F씨 부부>의 원고에서 ‘I’를 전부 ‘We’로 바꿨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젤다가 출산 직후 했던 “이 애가 아름다운 바보, 작고 예쁜 바보로 자랐으면 좋겠어.”라는 말은 나중에 스콧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여주인공 데이지의 대사로 등장한다. 그래, 사람들의 대사를 엿듣고 그걸 소설화하는 일은 다른 이들의 작품에서도 비일비재하니까 그렇다 치자. 그렇지만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922년부터 젤다는 꾸준히 에세이와 단편을 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사장되거나 부부 공저, 또는 스콧의 작품으로 발표된다. 젤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Girl 시리즈’ 단편들이 1929년에서 1931년 사이에 차례로 발표되었는데, 그중 다섯 편은 스콧과 공저자로, 한 편은 스콧의 작품으로 실렸다! 그것도 모자라 신경쇠약 증세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젤다가 쓴 자전적 소설 《왈츠는 나와 함께》는 스콧이 읽고는 자신이 쓰려고 한 《밤은 부드러워》와 내용이 겹친다고 분노한다. 스콧은 젤다에게 수정을 요구하고, 그의 바람대로 대폭 수정된 상태로 출판된 그 책은, 출간 당시 혹평을 받는다. 그런데도 스콧은 젤다의 인생 전체가 ‘그의 글감’이며 그녀가 부부의 인생 경험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것을 훔쳤다고 여겼고 그녀를 “삼류 작가이자 삼류 발레 댄서”, “쓸모없는 사교계 여자”라고 비난하기에 바빴다(《젤다》,  ‘서문’, 13쪽). 이렇게 젤다의 작품 대부분이 남편의 이름이나 부부 공저로 발표되어 그녀는 생전에 작가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낭비벽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남편의  재능을 갉아먹어 그를 알코올 중독으로 몰아넣은 정신이상자 아내, 젤다 피츠제럴드. 그런데 그렇게 흥청망청 파티에 취해 살았다는 그녀의 삶 또한 가히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책 뒷부분에 실린 짧은 연보에서도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유추할 수 있다. 젤다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이혼을 요구했을 때도 스콧은 그녀를 집에 가두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런 주제에 두 사람이 할리우드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는 스콧이 17세 신인 배우 로이스 모런에게 반해 젤다와 그녀를 비교하면서 젤다에게 상처를 주다가 급기야 이렇게 말했단다. 자신이 로이스를 흠모하는 이유는 “적어도 그녀는 재능에 노력을 더해 무언가를 이룬 여성이기 때문”이라고. 오마이갓! 도대체 그들 부부 사이에 어떤 일이 있던 것일까? 젤다가 발레 레슨을 받으며 또 다른 재능을 발견, 발레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을 때도 그녀는 결국 입단을 포기한다. 가족 때문에. 이런 와중에 서서히 그녀는 신경쇠약을 겪게 되고, 조현병 진단을 받는다(이 또한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녀의 증세는 조울증이며, 병의 주된 원인은 가정 문제였다). 신경쇠약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할 때마다 스콧은 좀 더 저렴한 병원으로 그녀를 옮겼으며, 그런 와중에도 쉴 새 없이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이런 상태에서 의사들은 젤다에게 ‘순종적인 아내와 엄마의 위치’를 재교육한다는 명목으로 그녀에게 발레와 글쓰기를 금지한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스콧 피츠제럴드의 알코올 중독과 정신적 슬럼프를 모두 젤다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재능을 착취당하고, 출구처럼 찾은 발레를 통해 입단 기회가 찾아왔어도 가족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젤다. 정당한 이혼 요구에도 감금당하고, 결국 정신병원에서 일어난 화재로 세상을 떠난 젤다 피츠제럴드. 그녀의 삶에 한없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녀가 만일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남편의 미완성인 작품을 위해 자기의 완성작을 수정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써서 출간하고, 자신의 또 다른 재능인 발레와  회화로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었다면, 그녀가 과연 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갇혀 불길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갔을까? 그렇게 죽고도 스콧 피츠제럴드의 재능을 갉아먹은 ‘나쁜 아내’ 이미지를 뒤집어쓴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겨졌을까? 절대로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억압당한 젤다의 삶은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녀의 단편들은 대개 여성들이 자신의 재능 또는 커리어를 펼치려고 애써 노력하지만 이런저런 벽에 부딪혀 좌절되고 만다. 여자의 삶에서 결혼과 일은 양립할 수 있는지 묻기도 하며(<오리지널 폴리스 걸>), 가정을 버리고 꿈에 가까이 다가갔으나 성공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여자가 등장하기도 한다(<재능 있는 여자>). 순수했던 영혼이 타락해 망가지는 모습을 담은 이야기도 있으며(<미스 엘라>), 성공의 환상을 좇다가 그들을 소비하던  사람들에게 무참히 버림받는 이야기인 <미친 그들>은 젤다와 스콧의 삶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 보인다. 이렇듯 그녀의  단편은 주로 그녀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바탕으로 그려진다. 뒷부분에 실린 에세이에서 젤다는 결혼과 연애를 논하고, 여성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자유연애와 댄스홀, 방종 등 부정적 의미로 쓰였던 미국의 신여성 ‘플래퍼(flapper)’의 삶을 예찬하기도 하고, 화장에 빗대 여성의 자기표현 욕구를 위트 있게 쓴 에세이 <연지와 분>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이 에세이 또한 스콧의 이름으로 발표됐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스러울 뿐이다. 


그 많은 이름들과 번호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대체로 외롭게 살았고, 혹독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얼마 안가 한꺼번에 여러 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일 년을 런던 무대에서 보내는 동시에 파리의 스위트룸과 뉴욕 사이를 수없이 오갔다. 당시 그녀에게서 풍기는 긴박함과 미스터리의 분위기는 그녀를 매우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로 만들었다. (<오리지널 폴리스 걸>, 26쪽)

미스 엘라의 이야기도 여자들의 이야기가 다 그렇듯 러브스토리였고, 러브스토리가 대개 그렇듯 과거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대부분에게 사랑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잼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이다. 어제의 잼, 내일의 잼, 하지만 오늘의 잼은 없다. 여하튼 미스 엘리의 삶은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과거 언젠가’의 잼 위에서 그저 명목적으로 살았다. 날개로 허공에 눈부신 물보라를 뿌리며 물 위를 나는 새처럼 인생의 희로애락을 스쳐 지나면서. (<미스 엘라>, 81쪽)

내가 말하는 권리는 내일이면 죽고 없을, 속절없기에 더 애틋한 자기 자신을 실험할 권리를 말한다. 여자들은 열에 아홉은 일생을 임종  분위기로-그 분위기가 최후의 발버둥이냐 순교자의 체념이냐의 차이일 뿐- 살지만 내일 죽지는 않는다. 그 다음날도 죽지 않는다.  그들은 여러 가지 쓰라린 최후 중 하나를 맞을 때까지 쭉 살아야 한다. (<플래퍼 예찬>, 125쪽)

목청이 좀 죽기는 했지만 여전히 도덕군자들은 얼굴 윤색은 도덕성이 의심스러운 여자의 증거이고, 부끄러운 돈 낭비이고, 그럴 돈이 있으면  중국에 기독교와 라디오와 세계대전을 전파하는 데 쓰겠으며, 그것은 부자연과 죄악이라고 외친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번영과 힘이 있으면 거기에 예술과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과 장식을 바라는 취향이 따르기 마련이다. 미국 전체가 할리우드가 되고,  극장에서 비너스가 좌석 안내를 하고, 살로메가 코트보관소에서 일하는 그날까지, 예쁜 처자들이 더 많아지고, 이미 예쁜 처자들은 더  예뻐져라. (<연지와 분>, 149쪽)


《젤다》를  덮고 나니, 앞으로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읽을 때 더 이상 예전처럼 열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비판의 눈으로 읽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는 젤다의 향기가 느껴지는데? 생각할지도 모른다. ‘안다는 것은 상처 받는 일’이라는 말도 있듯이,  나는 이 책 《젤다》를 읽음으로써 스콧 피츠제럴드를 잃어버렸다. 어떤 면에서는 그에게 상처 받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젤다 피츠제럴드라는 한 작가를 새로이 얻었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비롯해 젤다의 평전도 이 땅에 소개되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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