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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Jan 29. 2021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은 하나라고

오라시오 키로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처음 만나는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 이 책 표지에는 짐짓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이렇게 쓰여 있다. “<목 잘린 닭>과 <깃털 베개>부터 읽어보라, 가히 천재적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받아 들고 두 작품 가운데 좀 더 흥미로워 보이는 <깃털 베개>부터 읽기 시작했다. 늦은 밤에 베개를 베고  누워서 책을 읽기 시작했기에 이 제목에 더 눈이 갔는지도 모른다. 짧은 작품인데 매우 강렬했다. 소름이 쭈뼛쭈뼛 돋다가 결국 내  머리 아래 놓인 베개를 꺼림칙하게 쳐다보게 된다. 아마 이 작품을 읽는 이들은 모두 그러할 것이다. 시작 부분부터 무언가 불길한  일이 곧 일어날 것 같다.


그녀의  신혼생활은 몸서리가 날 만큼 두려운 나날이었다. 남편의 냉혹하고 모진 성격 때문에 천사처럼 온순한 금발 신부가 어릴 적부터  동경해온 신혼의 꿈은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는 남편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러나 함께 밤거리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남편은 한 시간 전부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키가 큰 호르단을 슬쩍슬쩍 쳐다볼 때마다 약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호르단 역시 그녀를 가슴 깊이 사랑했다. (<깃털 베개>,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97쪽)


모두가 단꿈에 젖는다는 신혼이라는데, 왜  여자는 두려운 것일까? 남편은 냉혹하고 모진 성격이다. 함께 밤거리를 걸어 집으로 오는 길에 다정한 말 한마디 없다. 심지어  남편을 바라볼 때 여자는 오싹한 기분까지 든다. 남편은 그런데도 아내를 깊이 사랑한다고 한다. 이 몇 개의 문장 안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임이 암시된다. 저 문장은 이윽고 ‘4월에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석 달 동안 아주 특이한 신혼생활을 보냈다’로 이어진다. 아주 특이한 신혼생활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얼마나 달콤한지 ‘허니문’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진  신혼. 그런데 아내 ‘알리시아’는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밤마다 무엇인가 공포에 짓눌려 비명을 지른다. 남편  ‘호르단’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의사를 불러와 진찰하도록 해보지만, 의사 또한 아내의 병명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빈혈기가  심하다는 말만 할 뿐인데, 아내의 병은 차도가 없고 나날이 심해져만 간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작품은 해설 부분에 ‘결혼이라는 현실에 부딪혀 무너지는 여성의 성적 환상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그보다는 억압적인 결혼 생활에 짓눌린 여성의 삶을 공포라는 외피를 두른 채 묘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신혼인데도 두렵기 만한  생활, 냉혹하고 말이 없는 남편, 자신을 사랑한다는데도 ‘오싹’한 느낌을 주는 남편. 그런 이와의 결혼 생활이 달콤하기는커녕  순조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억눌린 결혼을 이어나가다가 여자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고 앓아누운 것은 아닐까? 특히 이 작품  결말을 장식하는 ‘그 사건’은 아내를 착취하는 남편이란 존재의 은유로도 읽힌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깃털  베개>는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풀이할 수 있는 다양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환상과 공포로 빚어진 작품으로만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이렇듯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그 풍부한  상징과 모호한 결말에 있지 않을까.


이렇듯 공포와 환상이 뒤섞여 풍요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작품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의 주를 이룬다. 무시무시한 제목인  <목 잘린 닭>도 마찬가지이다. ‘마시니페라스 부부에게는 아이가 넷 있었는데 모두 백치였다.’ 이렇게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아이들은 왜 무려 넷이나 백치일까? 그런 데다가 그 아이들은 온종일 앞마당에 있는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하는 일이라고는 늘 입을 헤벌리고 혀를 내민 채 초점 없는 멍한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고작이다. 아니,  정확히는 저 벽돌담을 응시한다. ‘아이들은 담에서 5미터 떨어진 곳에 놓아둔 벤치에서 꼼짝도 않고 그 벽돌만 빤히’ 쳐다본다.  백치인 아이들이 하루 종일 뚫어져라 벽만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모습만으로도 왠지 오싹해진다. 대체 그 벽에 무엇이 있기에?  아니 무엇 때문에 아이들은 백치가 되어버린 것일까? 남모를 저주일까?


<목  잘린 닭>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마시니페라스 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어쩌다 하나같이 백치가 되어버렸는지, 그리고 그  백치 아이들이 벽돌담에서 무엇을 보는지 조금씩 밝혀진다. 그리고 그 백치 아이들이 빚어내는 비극도...... 이 작품을 읽노라면  사랑의 속성이 얼마나 나약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것인지 절감하게 된다. 멀쩡하게 태어난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저주라도 걸린  듯이 백치가 되어버릴 때마다 부부는 말은 못 해도 서로를 탓하고 원망한다. 처음에는 겉으로 표현은 못하지만 사태가 심각해질수록 결국 드러내놓고 상대방을 비난한다. 아이들이 잘못된 원인을 상대 집안의 유전적 결함에서 찾아내며 으르렁대고 싸운다. 그러면서도 욕망은  남아 있는지, 아니면 그토록 어리석은 인간이기에 또다시 헛된 꿈을 꾸고 이번만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와 바람 속에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일을 거듭한다.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가련한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을 다룬 작품 중에는 <천연 꿀>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결혼을 앞둔 ‘베닌카사’는 문득 밀림의  세계가 못 견디게 궁금해진다. 공인회계사로 평소에는 조용히 차와 케이크를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분별 있는’ 그. 그런데 결혼을  앞두니 ‘아무리 점잖은 남자라고 해도 결혼식 전날이면 자유분방한 삶과 작별하기 위해 친구들과 질펀하게 놀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베닌카사 는 두어 차례 강렬한 경험을 해서 평탄한 삶에 좋은 추억거리를 남기고 싶어 진다. 그래서 그는 파라나강을 거슬러  벌목장까지 나간다. 밀림 속에서 그는 정말 뜻밖의 일에 부딪히고 마는데, 위험한 줄 알면서도, 아니 위험하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욕망을 멈추지 못하고 그 욕망 덩어리인 달콤한 꿀을 벌컥벌컥 마신다. 그 탐욕스러운 모습과 이윽고 일어나는 일은 충격적일  만큼 섬뜩하다.


오라시오 키로가의 작품 안에서는 사랑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광기 어린 사랑과 욕망은 존재하는데, 그 사랑은 대부분 ‘광기’에서  싹텄기에 어떤 긍정적인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 아내와 남편으로 부부가 되었다 한들 <깃털 베개> 속 남녀처럼 달콤한 신혼  생활도 파국으로 치닫거나, <목 잘린 닭>의 부부처럼 백치 아이들을 계속 낳을 뿐이다. 결혼을 앞두고 ‘질펀하게  놀아야’한다는 그릇된 욕망은 뜻하지 않은 비극을 낳기도 한다. 광기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한눈에 반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사랑의 계절>에서도 ‘네벨’과 ‘리디아’의 순수한 사랑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한 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흐르듯  세월만 덧없이 흘러간다. 그들의 사랑이 이뤄질 만하면 광기 어린 인물(모르핀 중독된 리디아의 엄마)로 말미암아, 번번이 무너지고  만다.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처럼 애초부터 사랑이 일종의 ‘광기’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정신이  온전한 한낮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밤마다 시작되는 40도가 넘는 고열 속에서는 그 낯 모르는 이를 찾아 헤매고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런 광기 어린 여인의 사랑 고백을 들으며 처음에는 불쾌하게 여기던 ‘나’는 서서히 그 사랑 고백이 진짜라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어차피 사랑은 일종의 ‘광기’이자 ‘격정’, ‘환상’에 도취된 상태가  아닌가 싶어 진다. 이렇듯 오라시오 키로가가 그리는 사랑의 세계는 광기와 욕망이 뒤섞여 마침내 죽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다.


작가는 왜 이토록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했을까? 이 책 해설 부분에 실린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가 죽음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다. 태어난 지 두 달 무렵, 아버지가 오발 사고로 가족이 보는 앞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 후 의붓아버지마저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고 엽총으로 자살하는데, 열일곱 살이던 키로가가 그 죽음을 목격한다. 이런 비극은 끝이 없다. 1902년에는 키로가가 총을 살펴보던 중 오발되어, 친구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누나와 형이  장티푸스로 때 이른 죽음을 맞고, 1915년에는 아내가 음독자살을 시도해 키로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1937년, 오라시오 키로가는 위암 판정을 받은 뒤 치료를 받던 중 청산가리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심지어 그가  죽고 몇 달 뒤에는 장녀가, 몇 년 후에는 장남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렇듯 키로가 주변에는 실제로도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나  짙게 드리워졌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늘 쫓아다니는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가족의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거나 때로는 그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원인이 되어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았기에, 삶은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죽음이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리라. 죽음은 그 무엇도 넘을 수 없는 한계이다. 그 어떤 사랑도, 욕망도, 광기도 죽음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대자연의 법칙처럼 인간은 그 앞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사랑하고 욕망하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멘수들>의 두 노동자처럼 금세 탕진하고 말 것을 알면서도  잠깐의 향락과 즐거움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갖고 싶은 물건을 손에 넣고자 폭우 속 강물에 기꺼이 몸을 던진다(<강에서 나무를 건져 올리는 이들>).  살고, 사랑하고, 욕망하고, 꿈꾸고, 죽어가는 인간들. 그러한 삶이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서 환상적이고 강렬한  언어로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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