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유치부교사로 현장에 다시 돌아간 이유
눈을 뜬다. 다음날이 또 시작됐음에 절로 한숨을 내뱉는다. 해가 뜨지 않길 간절히 바랐건만, 이 바람이 무색하게도 햇살은 내 얼굴을 따스하게 비춘다.
하지만 따스한 햇살과 달리 손발은 점점 차가워진다. 다시 지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 없는 듯 교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맛있다는 말과 함께 밥 역시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움직이는 모양새는 007 작전 첩보원을 닮아있다. 따돌림을 당한다는 사실을 가족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스마일 가면을 쓴다. 엄마아빠를 걱정시키지 않겠다는 이유로 시작된 나만의 임무. 집 밖을 벗어나서야 웃음기는 싹 사라지고, 본래의 표정이 나온다. 외로이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야 만다.
15살. 그때의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초반에 친했던 친구들은 어느새 나를 놀리던 남자아이들과 편을 먹었고, 학교 담임 선생님은 눈에 생기 하나 없는 날 보고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밥을 혼자 먹고 있는 나를 무시하기 급급했다.
피곤해진단 이유로 반에서 벌어지는 일을 등한시했던. 한자를 외우도록 시키는 데만 열중하던. 숙제장을 제대로 완성해오지 않았단 이유로 학생들을 체벌하던 그를 마주하며 느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다 어른이 아니라는 걸. 학생을 사랑하지 않는 선생님 또한 존재한다는 걸.
따돌림보다 공포스러웠던 무관심. 그 속에서 난 사형수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길 바랐지만 실은 그 누구라도 먼저 내 아픔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사람의 따뜻한 관심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하늘은 사람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준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날 괴롭히던 고질적인 남자 애들 두 명은 3학년 때도 여전히 같은 반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친구와 선생님까지 선물로 주셨다.
우선 친구는 체육 시간에 혼자 신발로 땅만 긁고 있던 내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줬다. 남자 애들이 날 놀릴 때조차 나와 함께 꺄르륵 웃어주었다. 밥도 안 먹고 화장실에서 울고 온 날 아무 일 없던 듯 반겨주었다.
또한, 담임 선생님은 초반에 밥을 혼자 먹던 내 옆에 앉아 같이 밥을 드셔주셨다. 물론 체육 선생님이고 남자 선생님이라 말이 부드럽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그때의 내게 무엇보다 사람의 온기가 필요하단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아무리 얼음이 꽁꽁 얼려져 있어도 온기가 더해지면 흐르는 물이 된다. 어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구와 선생님이 건네주던 핫팩과 같은 온기에 툭하면 부러질 것 같던 마음은 해동이 되어버렸다. 결국 젤리처럼 말캉말캉해지게 되었다. 놀이공원에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어린아이처럼 다음날을 기대하며 잠들 수 있었다.
나는 한때 내가 이 세상에 사라지길 바랬어. 온 세상이 너무나 캄캄해 매일 밤을 울던 날. 차라리 내가 사라지면 마음이 편할까
모두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두려워. 아름답게 아름답던 그 시절을 난 아파서 사랑받을 수 없었던 내가 너무나 싫어서. 엄마는 아빠는 다 나만 바라보는데.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 자꾸만 멀어만 가
(중략)
그래도 난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 밝은 빛이라도 될까 봐. 어쩌면 그 모든 아픔을 내딛고서라도 짧게 빛을 내볼까 봐.
볼 빨간 사춘기 - 나의 사춘기에게
무관심과 폭력 속에서 재가 되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희망이란 불꽃. 이 불꽃은 덕분에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꿈을 꾸는 연료가 되어주었다. 따뜻한 관심이 나의 인생을 바꾼 만큼, 나 역시 내가 그 역할이 되어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는 교육 공간을 세우겠다는 꿈을 말이다.
그래서 난 이 꿈을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로 돌아갔다. 쉬는 시간에 귀가 웅웅 거릴 만큼, 한 번에 12명을 케어하는 것이 쉽진 않지만 그래도 한 명 한 명 눈을 맞춰주고 사랑을 건넨다. 따스하게 안아준다.
하지만 실은 아이들을 안으면서 난 혼자 고통에 몸부림치던 어린 나를 안는다. 토닥거리는 손길. 사랑한다는 음성에 비명 소리는 점점 줄어든다. 15살 외로웠던 아이의 표정엔 살며시 미소가 깃든다.
아, 난 혼자가 아니구나 하고 되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