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죽음의 수용소에서
오늘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었다.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마다 이 책은 꼭 읽어봐야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읽어보자하고 생각만 하다 뼈아대 유튜브에 관련 내용이 나오길래 바로 결제해서 읽게 되었다.
읽는 내내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그 끔찍한 환경 속에서 버텨낸 이 분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고 다시는 이런 폭력이 자행되지 않기를 바랐다. 또한 이 경험을 글로 써주신 빅터 프랭클 작가님께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치즘 즉 히틀러가 주창한 우월주의는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괴롭히고 사람으로서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어냈다. 같은 수감자였음에도 자신이 카포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감시관들보다 더 악랄한 권력을 행사하게끔 만들었다.
먹을 것이 거의 없고 위생 상태도 끔찍한 환경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잃어갔고 죽음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시련에서조차 의미를 찾아내고 질문을 던질 수 있게끔 빅터 프랭클은 다른 수감자들을 이끌었고 이를 충실히 이행한 사람들은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와 진드기가 득실득실하고 조금만 쉬려하면 폭행을 당하기 일수였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없는 수감생활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는지 글을 통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빅터 프랭클은 너무 힘든 나머지 저녁에는 뭘 먹을 수나 있을까, 오늘은 또 얼마나 맞을까 등 부정적인 상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를 멈추고 사랑하는 아내와 대화하는 상상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힘듦을 조금은 더 잘 버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랑은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다보면 내 모든 걸 다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피골은 상접해지고 시도 때도 없는 노동과 폭력 그리고 병에 계속 걸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환경이기에. 하지만 작가는 단 하나만큼은 절대 빼앗겨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바로 진정한 영혼의 자유다. 삶이 던지는 질문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은 채 해답을 알아가기 위해 계속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짜 자유를 누리는 행동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이 비유가 참 와닿았다. 그 때 그 순간엔 너무 끔찍해서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지만 결국 언젠가는 이 고통 또한 사라진다는 것.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너무 매몰되다 보면 결국 이유를 찾지 못했을 때의 그 허망함을 견딜 수가 없다. 나 또한 한동안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썼던 적이 있었고, 이는 내게 도움이 되기보다 지금 하는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막기만 했다. 삶을 살아가야 되는 거창한 이유를 찾으려 하기 보다 그 시선을 나를 향해 돌린 채 지금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고 있는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일단 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하지 못할 것이기에.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자유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있다. 누구든 간섭받지 않는 자유를 원하지만 갑자기 찾아오는 틀 없는 자유는 오히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 오히려 틀이 잡혀 있어야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 난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며 공부한다. 진짜 자유를 위해.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내가 내 인생에 책임을 진다는 것. 내가 하고싶은 일을 다 하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구하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에 충실히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단지 시련 속에서도 - 그 시련이 피할 수 없는 시련일 경우 -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대 갈등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시련을 바라보는 시각 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의 토대를 일궈낸 대부분의 기성 세대분들에게는 시련은 당연한 것이지만 나와 같은 대부분의 젊은 세대에게들에게 시련은 무조건 피하면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인정하고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시련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되 피할 수 있는 시련은 피하는 것이 낫다는 인식을 서로 공유하다 보면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싶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적절하게 행동할 기회와 의미를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은 실제로 우리 삶이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하루하루를 소중히 생각해야하고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응원의 손길을 건네야 한다. 두번째 삶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는 말은 다시 부여받게 된 소중한 기회라고 인식한 채 살아가는 것과 같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다.
짧은 책이지만 많은 교훈이 담겨있는 책이다. 꼭 읽어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