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 번의 수술을 받았다. 대학병원에서 받은 세 번째 수술은 개복수술로 결정되었다. 수술 후, 배꼽 아래로 13센티 정도의 흉터가 생겼다. 켈로이드 자국이 세로로 길게 각인됐다. 그 부위를 만질 때면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뺀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다른 피부와는 다르다. 살짝 튀어나오고 부푼 붉은 자국. 분명 내 피부인데, 마치 타인의 것인 것처럼 생경하다.
나는 내 몸이 마음에 든 적이 없다. 키가 작다거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그럭저럭 자잘한 몇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니라 결정적 이유로, 도무지 내 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열두 살 무렵이었다. 내가 몸을 떨며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쓰러진 것은. 경련은 잦아들었다가도 곧 다시 찾아왔다. 나는 할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댄 채 자동차 뒷좌석에 누워 급히 병원으로 실려갔다.
"오늘은 일 가지 말어라."
"아가 이 모양인데 일은 무슨."
할머니와 아빠의 대화가 들려왔다. 나는 놀랐다. 다른 것보다 아빠가 나를 그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에. 뇌파검사와 mri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약이 잘 듣는, 소아에게서 나타나는 뇌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처음엔 하루에 세 번, 세 알의 약을 먹었다. 다음엔 하루에 세 번 두 알, 하루 두 번 두 알. 점차 약을 줄여나갔다. 과정은 지난했다. 재발하면 다시 하루에 세 번 세 알부터 시작해야 했다. 가족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고 별것 아닌 것처럼 행동하면 별것 아닌 게 된다고 믿는 것 같기도 했다.
예상 밖의 순간에 내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발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일상을 잠식했다. 내 몸은 태어날 때부터 고장 났다고 여겼다. 또래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거추장스러운, 불편한 몸. 남들보다 현격히 불편한 몸을 가졌다는 결정적 이유로, 나는 내 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랑과 증오는 비슷한 동기로 발생한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몇 가지 이유는 별 소용이 없다. 단 하나의 결핍, 강렬한 열등감이 연료가 되어 불을 지핀다. 내게 지펴진 것이 사랑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에도 내 몸을 사랑할 수 있는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두려움과 불안에 익숙했고, 자연스럽게 증오를 택했다. 그게 증오인 줄도 모르고.
뇌전증이 지나간 자리에 암이 왔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는 내내, 익숙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 몸이 언제 어떻게 날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었다.
항암제를 주입하는 주사를 맞고 누워있는 동안, 나는 내 몸과 남겨진다. 가끔 억울하면 증오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와중에도 제 할 일을 하는 심장이 느껴지면 낯선 따뜻함을 느끼기도 한다. 낯선 따뜻함. 아마도 그게 사랑의 감각일 것이다. 몸과 남겨진 나는 처음으로 몸의 소리를 듣는다. 균일한 심장 박동, 여전히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손가락, 약물을 받아들이는 미세한 혈관, 약간의 두통.
항암치료 후, 피부가 약해진 탓에 햇빛 알레르기가 생겼다. 피부가 오래 햇빛에 노출되면 쉽게 타고 두드러기가 난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햇볕을 쬐며 산책하는 게 낙이었는데 면역 수치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마저 할 수 없게 됐다. 확실히 내구성이 좋지 않은 몸이다. 그럼에도 심장은 제대로 뛰고 내 혈관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약물을 전달했으며, 빠졌던 머리카락도 한 달에 1센티 이상 잘 자란다. 그렇게 거부하는데도 몸은 다시 내게 돌아왔다. 여전히 여리고 약한 채로. 나는 이제야 나를 연민한다.
거울에 내 몸을 비춰본다. 여전히 흉터는 낯설다. 그 위에 공들여 연고를 바른다. 도무지 사라질 것 같지 않은 흔적이지만, 사실 사라지길 바라고 바르는 것도 아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화해랄까. 오래도록 증오했지만, 여전히 잘 버티고 있는 약한 것과의 화해. 손끝에 힘을 빼고 13센티의 길을 더듬는다. 조금씩 머뭇거리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