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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Oct 23. 2024

누구에게나 빛나는 순간은 있다

 어릴 때는 영화관에서 블록버스터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영화관에 앉아 있다 불이 꺼지면, 내 심장은 기대감으로 차분히 차올랐다. 프랜차이즈 영화관이 성행하기 전, 포항에는 명보극장이라는 영화관이 있었다. 한창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인기를 끌던 90년대. 나는 명보극장에서 외삼촌, 사촌들과 함께 영화를 봤다.

 

 쥬라기공원, 미이라 같은 시리즈물은 물론이고 볼케이노, 인디펜던스데이, 타이타닉 등의 재난영화도 매번 챙겨봤다. 내가 처음으로 이름을 외운 외국 배우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였다. 정말 미치게 아름다운 남자였다. 타이타닉을 보고 온 날, 처음으로 영화의 배경음악을 부른 가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다. 셀린 디온. 한동안 셀린 디온의 'My heatrt will go on'은 카페에서도, 레스토랑에서도, 거리에서도 들렸다. 음악학원을 다니는 친구들은 교실에서 리코더로 그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나는 그게 부럽기도 했다. 나는 감동을 의도한 모든 장면에서 감동했고, 긴장을 의도한 매 순간 긴장했다. 까다롭지 않은 좋은 관객이었다. 


 집이 어떤 상황이든, 때마다 영화관에 갈 수 있었던 건 외삼촌 덕이었다. 내게는 세 명의 외삼촌이 있다. 큰외삼촌은 장남으로서 책임감도 강하지만 고집이 세다. 매번 여름마다 조카들을 모아 바다로 여행을 간 것도 큰외삼촌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호텔 조리사인 둘째 외삼촌은 가장 다정했다. 조카들에게 맛있는 걸 많이 사줬다. 실없는 농담도 잘했던 그는 뭐든 괜찮다고 하는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선을 봐서 알게 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곳에, 조카인 나와 동생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당시 여자친구이자 이후 십 년 넘게 둘째 외숙모였던 여자는, 무려 한 시간 넘게 레스토랑에서 혼자 남자를 기다렸다. 조카를 데리고 온 남자를 슬쩍 흘겨보긴 했지만 별말 없이 나와 동생을 잘 챙겨줬다. '함박스테이크'와 '비후까스'가 대세였던 시기, 둘째 외삼촌은 늘 '비후까스'를 시켜줬다. 그게 더 고급이라고 했다. 삼촌의 여자친구는 예뻤다. 세련되게 잘 꾸미고 말투가 다정했다. 이후 삼촌은 그녀와 결혼했고, 딸 하나를 낳고 십 년 넘게 살다 이혼했다. 둘째 외숙모는 그 이후 연락이 끊겼다. 결혼 이후 초췌해져 갔지만 내게 둘째 외숙모의 이미지는 언제나 레스토랑에서 본 그 모습으로 남아있다.  


 막내 외삼촌은 조카들에게 늘 놀림의 대상이었다. 서른이 넘도록 결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린 나이였는데. 외삼촌은 노총각이라는 조카들의 놀림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막내 외삼촌은 변변한 직장이 없었고, 둘째 누나의 남편인 매형의 지원으로 편의점을 차려 장사를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조카들은 삼촌의 편의점에 놀러 가는 걸 좋아했다. 정확히는 편의점 뒤편에 있는 창고와 삼촌의 휴식공간을 좋아했다. 그는 홍콩 영화를 좋아했고, 이연걸이 출연한 영화의 비디오테이프가 늘 그곳에 있었다. 편의점 창고에는 담배 상자가 쌓여있었다. 나와 사촌들은 그 창고를 놀이터 삼아 뛰고, 거미처럼 담배 상자들을 타고 놀았다. 그러다 지치면 비디오 덱에 비디오테이프를 넣어 <정무문>을 봤다. 셀 수 없이 많이 봤지만 볼 때마다 재밌었다. 이연걸이 인력거를 끌다 발에 유리가 박히는 장면은 볼 때마다 감동적이었다.  


 막내외삼촌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조카들에게 비디오테이프를 선물해주곤 했다. <월레스와 그로밋> 테이프도 삼촌에게 선물 받은 것이었다. 386에서 486, 586으로 매년 컴퓨터가 진화하던 시기, 신기하게도 비디오테이프만큼은 한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월레스와 그로밋> 비디오테이프는 내게 약간의 상처를 주기도 했다. 내 사촌에게는 삼촌이 훨씬 좋은(더 비싼) 레고 세트를 줬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어렴풋이 조카에게 준 선물의 차이가 삼촌이 누이들에게 받은 것에 대한 차이에서 온 것을 알 것 같았고, 그래서 서운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어 포항을 떠나 독립했다.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고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아멜리에> 같은 프랑스 영화를 즐겨봤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특히 재난영화는 어쩐지 뻔했다.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이름이 유치한 공식처럼 여겨졌고, 홍콩 무술 영화는 내게 촌스러운 것이 된 지 오래였다.  

 '함박스테이크'와 '비후까스' 대신 일식돈가스가 대세가 되었다. 포항에 살 때 자주 가던 경양식집은 사라졌다. 둘째 외삼촌은 이혼 후 혼자 산다. 막내 외삼촌은 큰형의 지원을 받아 피자가게를 한다. 피자가게에 여전히 휴게공간이 있지만, 삼촌은 홍콩 무술 영화 대신 유튜브로 트롯 가수의 영상을 본다. 내게 외삼촌들은 지나치게 뻔하거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되었고,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처럼 중요하지 않은, 시대에 뒤떨어진 어떤 것으로 기억되었다. 조카들은 삼촌들을 찾지 않는다. 그들이 제안하는 모든 것은 이제 더는 신나지도, 즐겁지도 않다. 나는 기준이라는 것을 가진, 제법 까다로운 관객이 되었다. 


 수술을 마치고 본가에 있는 동안, 큰외삼촌이 찾아왔다. 그다지 고맙지 않았다. 마지막에 나를 안아줄 때도, 어색했다. 그때의 나는 모든 감정이 부담스러웠다. 둘째 외삼촌이 내게 책을 보냈다.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막내 외삼촌은 스트레스받을 때 먹으라며 카카오 99% 함량의 다크초콜릿을 보내줬다. 맛이 없어서 더 화가 났다. 왜 날 환자 취급 하냐며 도리어 짜증을 냈다. 물론 혼자. 나는 정말 까칠하고 예민한 환자였다. 모든 치료의 과정을 마치고 나서야, 그 모든 것이 내가 그들의 조카이기 때문에, 나의 어릴 때를 기억하기 때문에 내보일 수 있는 성의라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여전히 책을 좋아하는 것도, 초콜릿을 즐겨 먹는 것도 기억 없이는 알 수 없었을 테니. 


 지금의 나는, 노총각이라고 놀렸던 막내 외삼촌보다도 훨씬 더 많은 나이가 됐다. 나는 혼자 산다. 프랑스영화보다 해리포터를 좋아한다. 멋지고 의미 있어 보이는 것보다 귀엽고 다정한 게 좋다. 일본식 돈가스에서 패밀리레스토랑, 오마카세. 변할 때마다 난리법석인 유행보다 그냥 그 자리에 오래 있는 게 좋아졌다. 그래서인가 보다. 문득 이연걸의 정무문과 담배 상자를 장난감 삼아 뛰놀던 창고가 생각나는 것은. 방학이 되면 어떻게든 조카들을 데리고 바다로 갔던 성의를 이해한다. 철마다 재미있다는 영화는 다 보여준 것 역시, 진부한 게 아니라 나름의 정성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인간의 성격은 '입체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외삼촌들을 떠올린다.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평생을 한 자리에 머물며 살아가지만, 적어도 어릴 때의 나에게는 판단할 필요도 없을 만큼 좋은 사람들이었다.  


 시간의 흐름은 대부분의 인간을 가라앉게 만든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빛나는 순간은 존재했다. 가라앉은 모든 것은, 누군가의 추억이었고 애정 어린 무엇이었다. 낯선 모두에게 지금의 모습으로 판단되겠지만, 추억을 공유한 이들만큼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나도 가라앉을까. 가라앉는 게 그렇게 나쁜가. 발버둥 치기보다 가라앉은 것들과 함께하는 삶도 멋지지 않을까. 가라앉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기억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 꽤 멋지다. 오랜만에 타이타닉을 봐야겠다. 그 영화를 봤던 시절은 내 기억 속에 빛나는 순간으로 가라앉아 있다. 그것만큼 아름다운 영화는, 여전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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