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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Oct 21. 2024

택시에서

 병원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내게 양해를 구한 후, 스피커폰으로 손자와 통화했다. 손자에게 신형 아이폰을 선물한 모양이었다. 기사는 일흔 넘어 자식과 손자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더니 나에게 택시 운전 예찬을 늘어놓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택시 운전은 은퇴후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외에 별다른 걱정이 없다고 한다. 택시에서 나누는 대화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기사분의 열정에 합당한 응대를 해야 할 것 같아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와~' 하는 소리와 함께. 보통 상대는 이런 반응에 힘입어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택시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점점 사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두 살 때 아내와 사별한 후, 홀로 아들을 키운 이야기, 아들을 위해 재혼하지 않은 이야기, 그 후 아들이 결혼하고 이혼할 때 혼자 슬퍼했던 이야기, 아들이 재혼한 후 새 출발을 축하하며 집을 사 준 이야기 등. 기사의 삶은 아들의 삶을 중심으로 이어져온 듯했고, 이제 택시일로 손주들에게 용돈을 줄 수 있어 행복해 보였다. 


 행복을 거머쥐었다 생각하는 사람들의 에너지는 중력이 강하다. 때로 그 에너지는 배타적이라 행복의 일부가 아닌 사람들을 외면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의 자부심은 외면하는 것들에 대한 의심 없이 단순하게 빛났고 부모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그 행복의 빛에 나는 합당한 응대를 했다. 

 

 여기서 병원에 도착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생각보다 차가 막혔고 택시 기사의 행복한 이야기는 노선을 달리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던 그가 갑자기 박정희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고속도로를 달릴 때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나는 고갯짓을 멈추었다. 정치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박정희가 잘한 게 참 많다고 했다. 자신도 한때 운동권에 몸담았지만 이제 그 시간들이 후회된다고. 아들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석했을 때는 박근혜는 잘못한 게 없다며 아들을 교육하기 위해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3번이나 반복해 보여주며 열변을 토했다고 한다. 나는 그 이후가 궁금해 '그 이후에 아들은 뭐라시던가요?'라고 물었다. 백미러로 보이는 기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 말이 맞다고, 알고 보니 박정희 대통령 좋은 사람 맞고 좋은 일 많이 했다고 한다며,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앞서 이야기로 미루어보건대, 아들은 아마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아버지가 6억이나 되는 아파트를 재혼하며 마련해 줬으니 더더욱 그렇지 않았을까. 받은 게 있으면 거절이 어려워지는 법이다. 택시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 고속도로 건설을 막기 위해 공사 전에 드러누운 이야기, 그럼에도 박정희가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건설을 해냈다는 이야기 등을 들었다. 하지만 기사의 강조에 의하면 그는 절대 정치적으로 편향된 사람은 아니다. 그저 박정희라는 인물을 좋아할 뿐. 지금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 


 아들을 생각해 일흔이 될 때까지 재혼하지 않은 헌신적인 아버지이자 손주에게 용돈을 주기 위해 택시를 모는 열정적인 할아버지. 동시에 과거의 젊음과 뜨거운 피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노인. 나는 한 사람의 생애 동안 생긴 간극을 떠올리며 백미러로 연신 듣고 있다는 표시를 냈다. 


 택시는 어느덧 병원 가까이 왔고 그는 젊은 사람이 이런 얘기 잘 들어줘 고맙다며 특별한 건강 팁을 주겠다고 했다. 건강 팁이라면 병실에서 들을 만큼 들었는데 택시에서까지 듣고 싶지 않았지만 알려달라고 했다. 장녀인 나는 어른들의 말을 중간에 끊지 못하고 잘 들어주는, 나에게 해가 되는 버릇이 있다.

 

 "무조건 낮밤이 바뀌면 안 돼요. 무조건 제시간에 자고 나이가 들어도 활동을 해야 해. 아니면 암 걸려."


 기사는 퇴직 후 무력하게 지내다 암에 걸리거나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 이야기를 했고, 이미 암에 걸린 나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 어떤 삶의 경험은 나이와 순서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그것도 나쁘진 않다. 그게 결코 인생의 끝이라거나 최악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뿐이다. 아직 겪지 않은 그에겐 최악의 일이겠지만. 


 그는 장어를 보양식으로 한 달에 한 번은 챙겨 먹어야 한다고 했고 부산에서 좋은 장어를 적절한 가격으로 사려면 엄궁동에 있는 장어직판장에 가서 '키로당 3 미 짜리'를 사야 한다고 했다. 항암 후 단백질 수치가 떨어져 면역력이 걱정이었던 나는 그것만큼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엄궁동. 킬로당 3 미.'를 기억하려 애썼다. 그렇게 장어 이야기를 끝으로 택시는 병원 앞에 도착했다. 기사는 나와의 대화가 즐거웠다고 했고 사실 내 이야긴 제대로 한 게 없지만 장어 직판장에 대한 정보만으로 충분했던 나는 조심히 가시라며 택시에서 내렸다. 


 산정특례대상자가 되면 5년간 '세법상 장애인'으로 등록할 수 있다. 다른 혜택은 없지만 연말정산 시 세액공제가 꽤 되기 때문에 등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연말정산용 장애인 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병원에 온 나는 서류 신청을 한 후 잠시 기다렸다. 문득 택시 기사에게 이 이야길 했다면 경부고속도로에서 박정희 이야기 대신 암에 대한 이야길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락하고 견고한 행복에 도취된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생각보다 열린 마음으로 훈수를 둔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지나치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일 뿐이다. 그들은 살아가는 내내 공감과 훈수의 차이를 느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듣는 이가 피로할 뿐.


 장애인등록증을 발급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택시를 타려 했다가 그만뒀다. 대화할 필요 없이 땅 밑을 지나는 지하철을 타야겠다고 생각하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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