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20대 초반, 내게는 3년 만난 연인이 있었다.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던 어느 날, 학교 근처 아파트 길을 산책하다가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는 걔가 헤어지자고 하면 어떨거같아?"
"어쩔 수 없지 뭐."
"안 슬퍼?"
"슬프겠지. 근데 이겨낼 수 있어."
"그걸 어떻게 알아?"
"걔가 없었던 많은 날들도 나는 잘 살아왔으니까."
친구는 그런 내게 너는 이럴 때보면 애가 참 정이 없다면서 타박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정말 그 아이에게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고 관계가 끝나게 되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지금 생각하면 연애라고 부르기도 참 어리고 미숙했던 옛 기억이 아니다.
세상엔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엄밀히 말하면 한 가지도 없다고 확신한다. 살면서 소비하는 많은 물건들이 그렇다. 그것들의 대다수는 내가 만들어낸 것들도 아니며, 또 그 중의 다수는 몇 년이 지나면 금새 실증이 나고, 또 거의 대부분은 내가 죽을 때 버려질 뿐이다.
살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아무리 친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대부분을 알지 못하고, 쉽게 감추는 그 날 그 날의 기분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그들이 나를 어떤 면에서 싫어하게 되어 나와의 관계를 끊고 싶어 한다면, 그건 내가 어쩔 도리가 없다. 그 사람들은 내 것이 아니니까.
어렸을 때부터 모든 사람과 물건은 내 것이 아니고, 세상은 원래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고 수없이 되뇌이고 믿어왔음에도 이 넓은 세상에 나 혼자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진다. 외롭다라는 말에는 참 요상한 힘이 있어서 외롭다고 한 번 느끼고 나면 끝없이 깊은 동굴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하지만 외롭다고 해서 사람과 물건을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운동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직은 좀 서툴지만, 지금보다 더 강한 근력과 체력을 기대하면서. 세상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도 없지만, 그래도 내 몸은 내 것이니까. 죽을 때까지 내가 온전히 가지고 가는 유일한 것이니까. 더 아껴주고 강하게 다져줘야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어릴 때 친구와 영어 교과서에서 이 구절을 읽고 비웃으면서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 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데 사과나무를 심을 시간이 어디있냐고, 나는 모아두었던 돈으로 배터지게 소고기를 구워먹고 비행기를 타고 미국 여행을 가겠다고 했고, 친구는 하루만에 그걸 어떻게 하냐면서 자기는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집에서 컴퓨터 게임이나 실컷 하다 죽겠다고 했다. 내일 죽을건데 사과나무를 심긴 왜 심어? 그 사과가 나는 것도 못 볼텐데. 라면서 친구랑 킬킬대던 게 생각이 난다.
근데 나는 이제 그 말에 공감한다. 나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내가 키우던 올리브와 유칼립투스, 몬스테라에 물 줄래. 물도 주고 햇빛이 좋다면 빛도 쬐어주고, 좋아하는 노래를 실컷 들으며 산책할래.
세상에 내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지만, 잠깐이라도 내 것인 모든 것들에 눈길 한 번 더주고 애정 더 담으면서 그렇게 살아야겠다. 모든 게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어릴 때나 지금에나 변한 바 없지만, 이렇게 생각하니까 냉소적으로만 기울던 마음이 조금 따뜻해지는 것 같아서 좋다.
생각을 하며 살려고 하면 사는 게 더 어렵다. 그냥 별 생각없이 관성으로 살아가면 편한데. 3월 19일.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의 3월 19일이 더 내게 찾아올까. 내년의 3월 19일에는 나는 무엇이 더 내 것이라고 생각할까. 가진 것은 없는데 생각은 많아서 그것만으로도 버거운 스물 일곱의 3월 19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