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GTX, 빨간 모자와 하늘색 마스크를 쓴 자그마한 체구의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움직였다. 붐비지는 않지만 자리는 없다. 일어나 자리에 앉으시라 하였다.
노인은 커다란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노인은 자리에 앉지 않고 내 옆에 서서 말했다. "젊은이가 참 고맙네" 젊은이란 말에 당황스러웠지만 그분의 연세를 생각하면 또한 이해가 되었다.
"내 나이가 구십인데.." 노인은 마스크를 벗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전철 안 승객들은 우리 둘을 흥미롭게 힐끔힐끔 살피고 있었다.
얼큰한 술냄새를 풍기며 오른쪽 뺨엔 커다란 멍자국이 있었다. 아마도 술을 마시고 어딘가 부딪힌 상처리라. 머리에 쓴 색 바랜 빨간색 모자에는 'ROKMC'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내가 해병댄데 교동에서 근무했어"
"아, 강화도 교동요?"
"어, 교동을 아네" 노병은 반가워하였다.
"내가 특등사수였어"라며 목에 걸고 있던 해병대 메달을 보여주었다. 그는 포항에서 박태준을 만났고, 목사가 된 김신조를 만났고, 펠레와 축구를 했다 하였다. 킨텍스역에 도착하기까지 노병은 같은 얘기를 다섯 번쯤 반복하였다. 그럼에도 무슨 얘기인지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자리에 앉으라고 몇 번을 권했지만 내 옆에 서서 계속 얘기하였다. 자리보다 대화가 더 필요한 듯하였다. 인상도 순하고 웃는 얼굴이 착해 보여서 불편하지는 않았다.
추운 날이었다. 집에는 어찌 갈지 물어보았다. 3보 이상은 걸어 다닌다고 걸어서 가면 된다고 유쾌하게 답하였다. 목에 걸린 얇은 마스크가 낡아 보였다. 가방에 있던 마스크 두장을 꺼내어 건네드리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마스크를 왼손에 꼭 쥐고 오른손엔 지방이를 짚은 해병을 뒤로하고 GTX에서 내렸다.
추운 겨울날, 쓸쓸한 GTX에서, 외로운 노병을 만났다.(26.1.29)
겨울, 그림자ⓒ소똥구리(26.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