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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산책

[양촌일기]

by 소똥구리

산책은 사색이다. 산중 암자라도 포행을 위한 오솔길이 있어 수행자들이 산책을 한다. 나도 걷는 것을 좋아하고 특히나 녹음 가득한 숲길 걷기를 좋아한다. 여름 숲길의 생생함은 어느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생기이고 가을 숲길의 여유로움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충만함이다.


대학 연구소에 다니며 박사 과정을 밟을 때, 오후에 나른해지면 학교 옆 개운산을 한 바퀴 돌곤 했다. 개운산에는 산기슭을 에두르는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적당한 경사와 커다란 나무들로 가득한 산길이 굽이굽이 아름다웠다. 한여름 에어컨으로 아픈 머리를 시원하게 씻어 주었고 가을이면 벅찬 삶의 동기를 채워주었다.


일과 중에 이렇게 숲 속을 정기적으로 산책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대학 연구소라서 가능했던 일이다. 박사 졸업을 위한 논문도 막막하고 미래도 불안하여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나오던 때였다. 그 시간을 잘 보낸 것은 숲 속 산책을 통해 위로받았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아버지는 내곡리에 작은 밭을 마련하셨다. 당신의 옷가지 하나 좋은 음식 하나 큰 사치로 여기는 분이지만 큰돈을 들여 밭을 사신 것이다. 가끔 그 돈으로 그때 서울에 아파트를 샀으면 큰돈을 벌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밭은 아파트 이상의 가치를 주었다.


팔순이 넘었지만 삽질을 하고 괭이질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나이를 잊고 강건하다. 밭에서 흙을 파는 아버지는 여전히 이십 대 청춘이고 삼십 대 신혼의 남편이다. 말 잘하는 막내 사위는 밭을 ‘아버지의 비싼 놀이터’라고 말하곤 한다. 정확한 비유이고 같은 생각이다. 밭은 아버지의 놀이터이자 피트니스클럽이고 명상과 추억의 공간이다.


아버지에게 나와 같은 일 없는 산책은 무의미하다. 밭에 가고 밭일을 하는 것이 아버지의 산책이고 사색이다. 밭에 오르는 굽이진 시골길, 그 길가에서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반겨주는 배나무, 밤나무, 벚나무, 매화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를 보며 밭에 오르는 것이 아버지의 산책이자 사색이다.


퇴뫼산 자락을 따라 오르는 길은 할머니와 함께 걷던 대둔산 산길이고 사방 숲으로 둘러싸인 밭은 옛적 할머니의 품속이다. (16.11.16_25.1.12)






사진_낙엽쓰는부모님소똥구리(2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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