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트륨 Mar 27. 2020

퇴사 면담과 ‘진짜_최종_계약서.pdf’

싱가포르로 떠나는 직장인 나트륨씨 #3

퇴사를 지르고 나니, 한 동안 정리하지 않았던 냉장고를 청소한 것만큼이나 후련했다. 상사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부터 후련하고 싶어서 부러 금요일 오후에 던져버린 것도 있다. 사실 너무 극단적인 것 같아서 주말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그다음 주에 말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주말 간 힘든 것은 나의 몫이 되어버리잖아? 어차피 붕 떠버린 마음 빨리 정리하자 싶었다. 이제 와서 글을 쓰니 뭔가 후련하게 털어낸 것 같지만, 내 퇴사 선언은 눈물 콧물 범벅이었다. 마음속 켜켜이 쌓여있던 불만들이 쏟아져 나올뻔했다. 그걸 참겠다고 이를 깨무니 애먼 곳에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근 일 년 반을 함께 싸워온 상사도 많이 지쳐 보였고, 퇴사를 말하면서도 함께 더 버텨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더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상사는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될 수 있게 리포트 올리겠다고 말해줬다.


이후 맞이한 주말은 너무 행복했다. 퇴사를 먼저 지른 상황에서 백수 생활에 대한 막연한 공포도 있었지만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구나라는 생각에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업데이트했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포트폴리오 정리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링크드인과 사람인도 뒤지면서 몇 군데 지원도 했고 헤드헌터 연락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불안했지만 행복했다. 언제까지 회사를 출근할지, 남은 휴가는 어떻게 소진할지 재미있는 고민거리들 투성이었다.



내 퇴사 사유에 대하여

즐거웠던 주말이 지나가고 다시 월요일이 등장했다. 출근길은 그래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주말 간 뭔가 생산적인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도 있었다. 고민거리는 단 하나, 다가올 면담을 잘 견뎌내기, 이 뿐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하면 내 퇴사 이유를 숨길 수 있을까부터 생각했다. 어차피 나가는 마당에 불만을 토로하고 나가는 건 내 신상에도 좋지 않고, 뒷 말이 나오는 것도 겁이 났다. 최대한 조용하게 나가고 싶었다. 사실 다 털어놓는다고 해결될 일이면, 이미 해결이 되었어야 할 일이다. 제발 내 주둥아리야, 이걸 명심하고 적당히 필터링하자! 고 다짐했으나 면담은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직 후,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묻기에 알만한 핑계를 대며 즉답을 회피했다. 그는 싱가포르 가는 건으로 내가 스트레스받은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며, 상황이 뜻대로 조율되지 않은 점에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모두가 바쁜 연말연초에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유로 퇴사를 말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니 내 본심을 물었다. 조건이 맞지 않아 거절한 오퍼는 이미 끝난 이야기이고 진짜 이유는 아니니 그 부분은 더 생각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하며, 지난 1년간 힘들었던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마무리하면서 여러 의견을 냈고 고충도 말했지만 1년 내내 내가 들었던 말은 조금만 견뎌보라는 말이었는데 여러 사건들이 지나가면서 이미 지쳐버린 내 상황을 이유로 들었다.


내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은 그는, 싱가포르 오퍼 건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다시 그 이야기로 돌아갔다. 내 입장에서는 이미 메일로 거절의 뜻을 전달하며 마무리된 일인데 그것을 퇴사의 주요 이유로 생각하고 싶은 건지 뭔지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다. 답답해서 내 본심이 계속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그래. 내가 진짜 그만두는 이유는 1년 반 동안 내 공을 연봉 협상하며 인정받지 못한 것과, 이 조직 내의 체계가 공정하지 않다는 부분이었는데 말하다 보니 팍 터져 나와 버렸다. 아... 정말이지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걸 말하면 납득할 줄 알았다. 불공평한 체계와 조직에 속해 있지 않다고 느끼는 소외감, 이게 찐 이유였으니까. 이미 오퍼가 싱가포르와 한국 사이를 오고 가며, 내 위치는 흔들렸고 내 존재가 계륵처럼 느껴졌다. 이 복잡한 구조 속에서 나만 그만두면 모든 게 깔끔해지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연봉 협상에 불만족한 상황에 싱가포르 오퍼마저 만족스럽지 못한 조건이었고, 사실, 이 연봉으로 1년을 더 다니는 것 자체가 숨 막혔다. 누누이 말해온 인력 충원은 내가 맡던 프로젝트에 매니저를 충원하고 나를 서포터로 넣어버리는 이 상황을 더 참아낼 순 없었으니까.


이렇게 까지 말하면 사실 못 잡을 줄 알았다. 아마 싱가포르에서 내 거절에 대해 ‘그렇구나’하고 넘어갔다면 바로 사표가 수리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싱가포르의 임원은 얻고 싶은 건 쟁취하는 분이었다. 그가 다시 조건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으니 이 결과를 조금 기다려 보는 것이 어떻냐고 물었다. 이제 더 말할 퇴사 사유도 없었기에, 오래 기다릴 순 없고 2월 말까지만 소식을 기다려보겠다고 하며 더 길어진다면 퇴사 일정에 대해 다시 논의를 드리고 싶다고 말하며 면담이 끝났다.


2월의 마지막 날에 받은 명문화된 계약서

2월의 마지막 날, 인사팀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진급과 연봉 인상 조건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계약서 형태로 상세한 내용들이 모두 적혀있었다. 진급은 정말이지 뜻밖의 보너스라 놀랐지만, 연봉을 올리려면 그 방법뿐이었던 것 같다. 사실 퇴사하겠다고 던지면서 싱가포르로 가는 건 아예 포기한 거나 다름없었던 터라 머리가 복잡해져 왔지만, 이렇게나 조건을 맞춰주는 상황에서 안 갈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이전 오퍼들에서 맘에 안 들었던 건 연봉이었기 때문에. 인사팀은 내게 3일 정도의 시간을 주었고, 최종 오퍼를 수락한다면 서명을 해서 회신해달라고 했다. 몇 가지 확인해야 될 부분이 있었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노라 말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를 추천해주고, 이렇게 조건도 맞춰준 SVP에게 메일을 보냈다. 이러한 오퍼를 다시 받았고 이렇게 힘써주어 고맙다며, 긍정적으로 회신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퍼를 받은 이후, 처음으로 현실적인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 어떤 부분을 확인해야 할지. 그리고 내가 정리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 리스트업 했다.


1. 퇴직금에 대해

한국은 퇴직금 지급이 의무이지만, 싱가포르는 따로 이런 제도가 없다. 따라서 한국 법인에서 퇴직금이 어떻게 처리가 되는지 확인해야 했고, 퇴직금이 없는 것을 염두해서 연봉도 계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싱가포르 인사팀과 한국 인사팀에 따로 확인해야 한다.

한국 법인 퇴사이기 때문에 트랜스퍼 전 퇴직금 정산이 필요하다고 답변받았다.


2. 한국 법인 잔여 휴가

올해 미처 사용하지 못한 내 소중한 연차를 트랜스퍼 직전 모두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아마도 문제없이 모두 소진 가능할 것 같다.

한국 법인 퇴사이기 때문에 휴가도 모두 소진 가능하다고 답변받았고, 싱가포르에서는 입사 시점에 비례해 연간 휴가를 지급할 예정이며 4월 입사 시, 총 20개 연차 중 15개를 지급한다고 답변받았다.


3. 복지 혜택 등 한국 법인 유효 기간

한국 법인에서 제공하는 여러 복지 혜택을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는지, 금액 제한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아직 답변받지 못했다. 아마 동일하게 퇴사 시점으로 적용될 것 같다.


4. 싱가포르에서 내가 받을 수 있는 보너스와 의료 혜택에 대해

연간 보너스가 지급되는지, 어느 정도 수준일지 확인해 내가 1년간 받을 수 있는 금액을 확보해두어야 안전할 것 같다. 싱가포르에서 아프면, 회사가 보험을 책임져 주는지에 대해서도 확인이 필요하다.

보너스는 연도별 회사 성과 및 개인의 성과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확답을 받을 수 없지만 연봉의 퍼센트 수준으로 확인받을 수 있었다. 보험에 대해서는 싱가포르 입국 시 더 자세히 설명받기로 했다.


5. 서울 집 정리

올해 7월까지 계약되어 있는 집도 집주인에게 연락해 연장 여부를 확인해야 하고, 부모님과도 논의가 필요하다.

해결 중


대략 이 정도로 리스트업 했고 이 내용에 대해 싱가포르 인사팀과 한국 인사팀에 내용 확인을 요청했고 바로 확인 가능한 부분에 대해서는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부모님께도 상황을 알리고 부동산을 어떻게 정리할지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머무르며 퇴사를 하는 것보다는 싱가포르에 1년이라도 나갔다 오는 게 내 경력 상 더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고 이렇게 가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시작 일자 조율 등 아직 몇 가지 확인할 부분들이 남았지만 이왕 가기로 결정되니 맘이 들떴다.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가 확정되어 사인된 계약서는 전자서명으로 대체해서 이메일로 발송했다. 이렇게 내 '진짜_최종_계약서. pdf'는 천방지축 좌충우돌이었지만 끝내 좋은 방향으로 결정이 되었다.


4편에서 to be continued


작가의 이전글 반복되는 거절과 오퍼의 연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