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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상샬롬 Jun 08. 2020

엄마의 아빠는 비단장수 왕서방

이런저런 이야기 7

  우리 엄마의 아빠는 비단장수 왕서방이었다.

그러니까 외할아버지가 중국인이셨는데 중국에서 북한을 통해 비단을 가져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파는 일을 하신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중국에 부인과 자녀분들이 있었으나 6.25가 터지고 3.8선이 생기자 돌아가지 못하고 우리나라에서 외할머니와 재혼을 하시고 엄마와 외삼촌을 낳으셨다.


  엄마 삼촌은 고등학교까지 명동에 있는 화교학교를 다녔고 지금까지도 엄마는 가끔씩 월병을 사드시러 명동까지 다녀오신다. 아직도 짧은 중국어를 하시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하다.


  엄마의 성은 "해"씨이다. 그래서 엄마는 이름을 말해야 하는 경우 항상 상대방이 놀라면서 다시 묻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이름을 얘기하면 두세 번씩 설명을 해야 했다.


  외할아버지가 중국인이셔서 엄마는 늘 기름에 튀긴 중국요리들을 많이 드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어릴 적에 엄마는 한국적인 요리들을 잘 못하시는 편이었다. 오죽하면 엄마 김치가 맛이 없어서 잘 안 먹곤 했는데 결혼하고 보니 그래도 그 맛없는 김치가 가끔 생각나고 그립기도 해서 엄마에게 조금씩 얻어오곤 한다.  지금은 연륜이 있으시니 음식 솜씨가 많이 느셔서 김치 빼곤 다 맛있게 하신다.

 

  암튼 그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결혼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엄마는 친정엄마가 빨리 돌아가셔서인지  20살의 나이에 아빠와 일찍 결혼해서 오빠와 나를 낳으셨다.


  가끔씩 나는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결혼해보니 엄마 생각이 날 때마다  더 자주 많이 불쌍하다 느껴졌다. 바로 친정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부모님 둘 다 일찍 돌아가셨으니 친정도 없고 다른 친척들도 없고 하시니 말이다.


  엄마도 내 나이 때, 아니 더 젊으셨을 때도 친정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셨을 텐데.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드셨을 텐데 그럴 때마다 어떻게 참고 이겨내셨을까.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삼촌 하고도 몇 년 전 연락이 끊겼다.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업을 하셨는데 연락이 점점 뜸해지시더니 언제부터인가 핸드폰 번호도 바뀌어 있고 더 이상 연락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화교단체와 화교 카페 등을 통해 내가 수소문을 좀 해보았지만 삼촌을 아직 찾을 수가 없었다. 조만간 꼭 삼촌이랑 엄마랑 통화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은데 그럴 날이 오겠지. 


  친정은 없지만 이제는 내가 친정보다 더 엄마를 많이 챙겨드리고 친구 해드리고 효도 많이 해야지.


"해 여사님, 지금처럼 항상 건강하세요"



친정엄마와 우리 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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