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겨울, 지금 사는 집에 전세로 이사를 왔다. 집을 보러 왔을 때부터 공실이라 좋았다. 한창 이삿짐을 풀고 있는데 30대 여자분이 들어오시더니 이 집에 살던 세입자라고 했다. 그리고는 서류봉투에서 집안 곳곳 찍은 사진들을 꺼내 보여주면서 하는 말.
자기네가 1년 반을 살다가 나갔는데 집주인이 집에 생활 흠집이라든지, 벽지가 떨어졌다던지, 거실 마룻바닥에 긁힌 자국까지도 다 물어내고 나가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기네가 만든 하자가 아닌데도 원래 있었던 집안의 하자까지도 물어내라고 하니 너무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다고 한다.
혹시 몰라 자기네들이 처음 이사 들어올 때 집에 하자가 있는 부분들을 다 사진 찍어두었다가 나중에 보여주었는데도 집주인은 절대 믿을 수 없다면서 무조건 다 보수해두고 나가라며 막무가내였단다.
그러다가 이 집을 그냥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매매가를 너무 비싸게 부르고 전혀 깎아주지도 않고 집에 하자가 너무 많아서 안 사겠다고 말한 후 이런 집에서 살다가는 너무 스트레스도 받고 더 당할까 싶어 만기를 몇 개월 남기고 먼저 나갔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우리에게 조심 또 조심하라고 이 집에서 오래 살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을 하고 갔다.
기분 좋게 이사해야 하는 날인데 이사하는 내내 남편과 나는 마음이 무거웠고 기분이 안 좋았다. 우리를 위해서 해준 말이라 고마웠는데 이런 집에 살게 된다는 게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지금 사는 아파트가 새 아파트도 아니고 15년도 넘은 아파트라 여기저기 손볼 데도 많고 하자도 많은 집인데 집주인이 너무한다 싶었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이삿짐이 들어오는 동안 계속 집안 구석구석 하자 난 곳을 확인하고 찍고 또 찍었다. 그리고 이사를 다 마치고 근처 사시는 집주인 분을 불러 하자 난 곳들을 다 보여드리면서 설명을 해드렸다.
집주인 분은 벽에 못질도 하지 마라, 마룻바닥에 물 닿게 하지 마라, 벽걸이 티브이도 하지 말라는 등의 말을 하고 갔고 남편과 나는 그저 한숨만 나왔다.
올해 겨울이면 전세 만기인데 이 집에서 더 살게 될지 다른 집으로 이사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좋게 좋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