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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상샬롬 Jul 07. 2020

아기를 기다림에는 실패란 없다

EBS 나도 작가다 2차 공모전 당선 글

  저희 부부는 동갑내기 부부로 둘 다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고 바로 아기를 갖기를 원했는데 2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바로 불임 산부인과로 갔습니다. 2007년 그 당시만 해도 난임이 아닌 불임이란 단어를 사용했던 때였습니다.


 신혼살림을 서울에서 시작한 저희는 나름 유명하다는 강남의 불임 산부인과로 갔습니다. 각종 여러 가지 검사를 둘 다 받았는데요. 남편은 별다른 이상이 없었는데 저는 배란이 불규칙하고 다낭성이라고 하더군요. 검사를 받는 김에 불임 카페에서 알게 된 나팔관 검사까지 받기로 하고 결과를 들었는데 나팔관 양쪽이 유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래서 자연임신이 안되었던 이유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수술 날짜를 잡아 복강경 수술로 나팔관이 유착된 것을 정상으로 만들고 수술을 하는 김에 자궁내막증도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평소에 생리통이 심했을 거라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며칠 후 첫 번째 자연 인공수정을 했는데 실패. 그다음부터는 과배란 인공수정을 계속 시도했어요. 배란이 잘되는 주사를 맞고 인공수정을 하는 것이었죠.    

 

 두 번째 인공수정은 임신에 성공했으나 5주에 유산, 세 번째 인공수정도 4주에 유산, 네 번째 인공수정은 6주 전에 유산, 다섯 번째 인공수정은 쌍둥이였는데 하나는 자연스럽게 출혈이 되며 유산되었지만 다른 하나는 자궁외 임신으로 나팔관 절제를 했습니다. 여섯 번째는 7주에 유산되었는데 다른 때는 유산이 되어도 자연스럽게 출혈과 함께 흘러내렸으나 이번에는 주수가 좀 되니 소파수술을 했답니다.    


 자꾸 임신 초기에 유산이 되자 습관성 유산 검사도 해봤는데 원인을 알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저는 여섯 번의 유산을 했지만 한두 번울고 그 뒤로는 울지를 않았어요. 그냥 그 상황을 간단하게 받아들이고 나름 그 과정들을 즐긴 것 같아요. '아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하네, 아 다음에는 저런 식으로 하는구나. 참 신기하다'라고요.    


 유산이 계속되어도'이번에도 약한 아기가 찾아왔나 보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는 '또 이번에는 복강경 수술을 하네, 아 이번에는 소파수술이구나.'라며 좋게 좋게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물으신다면 우선 제 자신이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기도 하지만 '임신되면 좋고 아니면 다음에는 잘되겠지. 다시 해봐야지.'라는 생각들을 더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한 힘도 있었지만 '그냥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해보자,  될 때까지 해보자'라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공수정에서 자꾸 실패를 하자 저는 병원을 바꾸었고 시험관을 시작했습니다. 과배란 주사를 열심히 맞으며 난자 채취를 했는데 다행히 난자가 46개나 나왔고 수정란을 24개나 얻을 수 있었습니다.


  24개로 네 번의 시험관을 했는데 모두 다 실패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인공수정보다 임신 확률이 높은 시술이라 두세 번 정도 하면 다들 임신이 되데 왜 나는 안 되는 건지.


  몇 달간 시도한 시험관에 몸도 마음도 지쳐갔습니다. 각종 주사에, 약에, 특히나 임신인지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들이 반복하게 되니 심리적으로 더 많이 지치더군요.


  흐린 줄도 안 보이는 임테기를 하루 종일 바라보는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이고 이러다 미치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힘들어하는 저를 바라보며 남편이 이제 그만하자고. 아기는 포기하고 우리 둘이 알콩달콩 이쁘게 살자고 하더군요. 마침 그 당시 남편이 회사 발령이 나서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잘 살아보자고 한번 더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꼭 해보고 싶었던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강아지와 매일 산책하고 같이 운동 힐링이 되고 삶의 활력소가 되더군요. 우리 부부의 몸도 마음도 치유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와 통화를 하는데 시어머니께서 “아가,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네 몸이 상할까 봐 그러니, 앞으로는 절대로 시술하지 말자. 우리는 손자, 손녀 다 필요 없고 너희 둘만 재미있게 행복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잘 살면 된단다. 그런데 혹시라도 네가 도저히 포기가 안된다면 언제든지 얘기하렴. 언제든 지원해 줄 테니 다시 시도하고 싶으면 아무 때나 얘기하렴.”이라고 하시는데 눈물이 펑펑 나더군요. 어쩜 이렇게 제 마음을 잘 아시던지요.


 사실 시어머니도 저희 남편을 낳으시고 아이를 더 많이 갖고 싶으셨는데 양쪽 나팔관에 자궁외 임신이 두 번 되면서 두쪽 모두 나팔관 절제를 하셨고 그 후 아이가 생기지 않아 무녀독남인 남편 하나를 키우셨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그래서 제 마음을 더 잘 알아주셨던 것 같습니다. 아기 없이 살기로 했는데 포기가 안 되는 그 마음을 말이죠. 임신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임신은 되는데 유지가 안 되고, 시험관은 임신 확률이 훨씬 더 높은데 왜

네 번 다 임신조차 되지 않는 것인지 답답할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큰 결심을 하고 계속 다니던 난임 병원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시험관을 4차까지 하고 1회분의 시술을 할 수 있는 수정란을 냉동해 둔 것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마지막 시험관 시술을 조용히 몰래 혼자 하고 오기로 마음을 먹고 시험관 날짜를 예약했습니다.         


 며칠 후 산부인과로 향했습니다. 출발 전 미리 생각해둔 준비물도 챙겼습니다. 네 번의 시험관을 하면서 느낀 게 이식을 하고 안정을 위해 한 시간여를 누워있다 오는데요. 이식할 때 원피스형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어서 그런지 이불은 덮어주지만 손, 발이 차고 조금 춥다는 느낌이 항상 들었거든요. 긴장도 되고 혈액순환도 잘 안돼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핫팩과 수면양말을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경기도 집에서 강남에 있는 병원으로 한 번에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병원에 도착해서 늘 편안하게 이모님처럼 대해 주시는 선생님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마음 편히 이식을 했습니다. 이식이 금방 끝나고 누운 채로 안정을 취했다 가는 병실로 옮겨 누웠습니다. 그때가 6월이었는데 그날따라 더 몸이 추웠습니다. 그래서 간호사분께 발 쪽이 좀 춥다고 얘기하니 따스한 바람이 나오는 온풍기를 발 쪽에 놔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챙겨 온 핫팩을 양손에 쥐고 양 발에는 핫팩을 붙이고 수면양말을 신었습니다. 그랬더니 몸이 서서히 따스해지더군요.    


 그렇게 한 시간여를 누워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직행버스를 탔습니다. 남편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가서 하고 온 시험관이라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아기 없이 살기로 했는데 약속을 안 지켰으니 혼날까 봐 걱정도 되고, 암튼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버스가 끼익 하며 급정거를 하고 오른쪽, 왼쪽 차선을 왔다 갔다 하는 등 난리가 났더군요.


 '이러다 사고 나는 거 아니야’라며 너무 놀라 앞자리에 있는 손잡이를 계속 꽉 붙잡았습니다. 몸이 앞으로 쏠리고 옆으로 흔들리고 하니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어요. 잠시 후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버스기사님과 옆 차선 자가용 운전자 간에 시비가 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운전자가 우리 버스 앞을 갑자기 막고 다른 차선으로 못 가게 하는 등 계속 깐족대며 위협을 했던 것이었죠. 무서움과 긴장 속에 한 시간여를 버스 안에 있다가 벌렁벌렁하는 가슴으로 집에 온 기억이 납니다.     


 이식하고 나서 절대 안정을 취해도 모자랄 판에 사고까지 날 뻔했던 버스를 타고 오면서 드는 생각이 ‘아 망했구나. 마지막 시험관도 실패구나. 내가 이걸 왜 했을까?, 나에게 아기는 진짜 없나 보다. 포기하자’라며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막 나가기로 했습니다. 4차까지의 시험관을 했을 때는 2,3일은 절대 안정하며 무조건 누워있고 피검사 때까지 조심하며 보내기 일쑤였는데 이번에는 미리 다 포기하니 마음도 몸도 편해서 평상시대로 청소하고, 빨래하고, 요리하고, 강아지와 산책하고 여기저기 다니며 바쁘게 보냈습니다. 게다가 남편한테까지도 비밀로 혼자 하고 온 시험관이라 절대 티를 내면 안 되는 상황이니 더더욱 평상시처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시간은 참 빨리 가더라고요.    


 이식 후 7,8일째가 되자 또 임테기가 하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하더군요. 기대도 안 하고 포기했지만 임신이 안된걸 확실하게 확인은 해보자라는 생각에 약국에서 임테기를 사 왔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제 생애 마지막 시험관 5차의 결과는 임신이었습니다. 임테기를 해보자마자 흐리지만 두줄이 바로 뜨더군요. 네 번의 시험관에서 한 번도 임신이 안되더니 마지막 시험관은 임신. 다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일주일을 바쁘고 빠르게 막 지냈는데 진짜 임신이라니. 인생은 정말 아이러니하더군요. 기쁨보다 얼떨떨했습니다. 그리고 유산이 또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어요.    


 그날 저녁 남편이 퇴근하자 임테기를 보여주며 이실직고를 했습니다. 혼자 몰래 마지막 시험관을 하고 왔는데 임신이라고 하자 남편 역시 기쁨반, 걱정 반의 표정이었습니다. 유산이 자꾸 되었으니까요. 그리고는 일단 둘이서만 임신된 것을 알고 있기로 하고 유산 위험에서 벗어나 안정권이 되었을 때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이제는 임신 성공을 기뻐할 때가 아니라 유산되지 않게 임신유지를 잘해야 한다,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이 생겼습니다.  


  다음날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하니 120이라는 정상적인 수치가 나왔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유산한 적이 많으니 면역주사를 맞자고 하셨습니다. 임신 5개월까지 매달 한 번씩 하루를 맞는 것인데 첫 번째 맞을 때는 아침에 와서 오후 늦게까지 하루 종일 누워 천천히 여덟 병의 약을 다 맞았고 그다음 달부터는 점점 맞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매달 하루 종일 누워 맞는 것이 참 힘들었지만 아기를 위해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신 노력을 위해 1년간 배웠던 수지침 센터를 찾아가 선생님께 손바닥에 수지침을 맞았습니다. 임신유지에 도움이 되는 혈자리에 수지침을 놔주신 거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수지뜸을 손에 열심히 뜨기 시작했습니다. 수지뜸과 침을 맞으면서 방광염도 없어지고 몸이 많이 따스해진 효과가 있어서 아기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했습니다.    


 피검사를 하고 임신 5,6주쯤 이쁜 아기집을 봤고 다시 2주 후 임신 7,8주쯤 아기 심장소리를 들으러 남편과 함께 병원에 갔습니다. 여섯 번의 유산을 겪으면서 단 한 번도 아기 심장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터라 긴장, 초긴장이 되더군요. 진료실 앞 의자에 앉아있는데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드디어 진료실로 들어가 선생님을 뵙고 굴욕 의자에 앉았습니다. 초음파 기계를 넣자마자 바로 들리는 건

“두구두구두구두구....” 엄청 크고 빠른 아기 심장소리. 콩알보다도 작은 아기는 정말 심장이 빨리 뛰었고 소리도 크더군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남편과 동시에 눈물이 왈칵. 이 소리를 듣기 위해 그렇게 멀리멀리 돌아왔구나 싶더라고요. 결혼 6년 만에 여섯 번 유산 끝에 처음 들어본 우리 아기의 우렁찬 심장소리였습니다.     


 선생님은 이번에는 잘 지켜보자고 하고 임신 3개월까지는 조심해야 하니 무조건 안정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초음파 사진과 심장소리를 녹음해 주셨습니다. 집에 와서 아기 심장소리를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모릅니다. 진료실을 나오자 그렇게 받고 싶었던 산모수첩을 드디어 간호사분이 주시더군요. 또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 “산모님, 다음부터는 산모수첩 꼭 가지고 오세요.”라고 하시는데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좋더라고요. 산모님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좋은 건지 처음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피검사 이후 시작된 입덧이 심장소리를 듣고 온 날부터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든 먹고 나면 바로 토를 했습니다. 물만 먹어도 토를 해서 하루 종일 변기를 잡고 지냈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여섯 번의 임신을 했을 때는 입덧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아기가 약해서 정말 여섯 번 모두 유산을 한 것이었을까요. 어른들 말씀에 "입덧하면 아기가 건강하다."라는 말이 자꾸 생각이 나서 저는 입덧을 심하게 하면서도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있구나’라고 생각하니 입덧도 감사하며 잘 버틸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입덧을 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이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열 달을 누워지내며 아기를 지켜내고 건강하고 이쁜 딸을 만났습니다.                                  


 저는 수많은 임신 실패를 했지만 그건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임신 성공이 되기 위한 기다림의 과정이고 준비과정이었습니다.


 지금도 난임으로 힘들어하시는 분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기는 가장 좋을 때 가장 건강한 아기를 만날 수 있다 말이에요.


결혼 6년 만에 6번 유산 끝에 만난 우리 공주


파란만장 난임극복 연재 글 첫 번째

https://brunch.co.kr/@sodote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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