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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그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나를 잘 모르면 작은 공격에도 크게 다친다

by 소심천

나는 환경안전팀에서 업무를 하고 있다

입사를 하기 전에는 환경안전팀은 도대체 어떤 업무를 하는지 잘 몰랐었다

전공도 그쪽이 아닌지라 주변에 그 분야로 취업한 사람도 거의 없었고

그 당시엔 환경안전 브이로그도 업무 활동까지 디테일하게 찍어 놓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열정이 부족한 서치 능력으로 파악했던 바로는

이 분야를 아예 알지 못하는 사람도 대충 유추할 수 있는 정도의

법적인 업무들, 현장 점검하는 활동이 전부였다

그러한 활동을 수행해 내기 위한 사무적 업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였다


이러쿵 저러쿵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긴 했지만

업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그것을 높이기 위한 노력조차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주변에 그 분야 취직자가 없으면 가고 싶은 회사 근처 카페에서라도 잠복하며

현직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고 실제 어떤 업무들이 있는지 파악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환경안전이 업무에서 보통 갑의 위치에 있을 거라는 착각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환경안전 팀에서 일을 하며 입사 전 예상했던 업무들을 하고 있는 건 맞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에는 예상하지 못한 노력들이 필요했다

그건 바로 여기저기 요청하고 부탁하면서 항상 아쉬운 사람은 내가 된다는 것이다


환경안전 관련된 법적인 요구사항이나

현장 안전성을 강화하기 위한 업무들을 하기 위해서는

현장 관리자들에게 현황 파악을 부탁하거나 발견된 불합리에 대한 조치를 요청해야 한다


아무리 환경안전이 경영의 제일원칙이고 최근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는 하여도

아직 국내 제조업 현장에서는 환경안전이 갑인 상황은 명백히 아닌 것 같다는 조심스러운 의견이다

(그렇다고 안전을 등한시한다는 건 아니고 다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에

굽신해야 하고 아쉬운 쪽이 되는 건 환경안전 담당자라는 말이다)


현장에 혹은 제품 생산을 위한 어떤 프로세스상에

환경안전 관련된 불합리가 있어 조치를 요청하게 되면

사실 그 요청을 받은 부서는 우리 부서와 이해관계가 맞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구매든 생산이든 품질이든 내가 요청한 업무를 기한 내에,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도 전혀 아쉽지 않기 때문에

늘 몇 번씩 재촉하고 확인하는 쪽은 내가 된다


그 부서 담당자의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나였어도 적절한 시기에 구매를 진행하고, 물량을 맞추기 위해 제품을 투입하고, 목표한 품질을 유지하는

그들 부서에서 맡고 있는 이러한 업무들이 중요하지

당장 안전과 직결되지도 않는 설비나 제품에 스티커를 붙여야 한다느니 하는

현장 관리와 관련된 성가신 요청을 맨입으로 하면 하기 싫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과정들도 환경안전 담당자의 숙명이라고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그 일을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면 불만도 없기 마련이다

그런 부탁과 요청들에 어느 정도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은

잘은 아니더라도 해낼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고

타당한 컴플레인이면 개선을 위한 창구가 되기도 한다

단순한 토로는 어느 정도 달래드리고 명확한 가이드를 제시해 주면 된다

무엇보다 이런 일 외에도 업무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많으니까

너무 자주 반복되는 상황들에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계속 업무 하게 될 사람들과 등지지 않기 위해서

나만의 대처 방안을 마련하여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업무를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일이

내 이런저런 업무 스트레스 중 차지하는 비율을 꽤나 성공적으로 줄였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은 그 모든 노력이 해결이 아니라 회피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를 무너져 내리게 한 경험이 있었다


리더, 선배 우리 부서의 그 누구도 없고 오직 나 혼자에 타 부서 실무자 수십 명이 있는 단체 메신저 방에서

같은 회사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고

오직 내 요청으로 인한 것만이 아닌 본인들의 모든 고충들을 눌러 담고 담다가

흘러나온 것까지 잔뜩 묻힌 듯한 화살에

속절없이 찔리는 과녁이 되어 버린 날이었다


" 환경안전팀은 업무 너무 편하게 하시려는 거 아니에요?"

" 규정 되게 좋아하시던데 그럼 그쪽이 하는 걸로 규정을 바꿔요.

내가 당신 리더한테 말해줘요?"

" 우리 부서 업무 이해는 하고 그런 식으로 요청하는 거예요?"


나를 후벼 팠던 그 많던 화살들은

다시금 상기함으로써 아물지 않은 상처의 딱쟁이들까지 떨어뜨려 버릴라

전부 혹은 일부를 지워버리고 이것들만 남았다


가장 깊은 곳까지 와닿은 화살은 내 '일처리'와 관련된 폭언이었다

첫 회사, 첫 부서이기에 아직 사회적 정체성이 형성되기 전이었던 나에게

가장 피하고 싶었던 평가는 '일처리를 똑바로 못 한다'와 같은 무능력에 대한 지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타 부서 사람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간에 그것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경험치는 나에게 부족했고

곧이곧대로 어쩌면 그보다 과하게 해석하였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부랴부랴 쌓은 모래성은 단 한번 바람에도 흩날려 사라져 버렸고

그 속에 있던 보잘것없는 작은 알맹이의 내가 드러났다

설령 아무도 날 의심하지 않더라도 그렇게도 스스로를 증명해 내는 데 바빴던 나는

누군가에겐 타격 하나 없을 수 있는 말들에도 쉽게 무너져 내린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였다

제품의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는 그 유해성이 기재된 서류를 법적으로 비치하여야 하는데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그 서류는 2년 주기로 개정이 되어야 한다

그 서류는 어떤 원자재를 다루는 임직원에게 본인이 다루는 원자재의 유해성을 알려주기 위한 서류이고

그 원자재의 유해성이 변경되었으면 변경된 내용을 임직원이 숙지해야 하기 때문에

2년이라는 주기를 설정하여 최소한 그 주기 내에 재검토를 하라는 명목이다


그리고 그 서류는 원자재를 제공하는 협력 업체와 직접적으로 컨택을 하는 부서에서 관리를 해야 하는 게 사내 규정이고 그 역할과 책임도 규정에 명시되어 있다

당연히 이러한 관리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지 유관 부서와 회의도 진행하고

부서별로 수행해야 될 업무들을 요청하였을 뿐인데

회의엔 참석도 거의 하지 않은 부서에서 협의 끝난 내용을 요청하고 나니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이와 관련한 업무를 진행하면서 미숙한 부분이 아예 없었냐 하면 아니라고 자신은 못 하겠지만

그럼에도 나름 비즈니스 매너에 민감한 사람으로서

유관 부서의 편의를 이해하고 또 대안을 제시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더군다나 딱 봐도 신입처럼 보이는 사람한테 그 정도의 언어적 폭력을 행사해야 했을까 싶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책임을 밖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음을 감안해도

내가 그 정도로 무책임하고 예의 없게 요청하였나 되짚어 봤을 때 걸리는 구석이 없다


처음으로 일을 하다가 눈물이 터졌고 얼른 화장실에 가 숨었다

간신히 추스르고 자리로 돌아가서 그 일을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 지었지만

난 지금까지도 그 부서와 부딪히는 걸 피하고 있다


회사 생활을 5개월을 하든, 5년을 하든, 15년을 하든 고통스러운 순간들은 있겠지만

가뜩이나 본인에 대한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은 시기에 겪는 이러한 공격들은 극복하기 힘든 상처를 주곤 한다


조금 더 나를 알고 조금 더 단단해진 이후에 겪었다면 그렇게 속상하진 않았을 걸 아쉽기도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그런 일들이 있었기에 더 단단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굳이 의도적으로 이런 일을 겪을 필요는 없지만 이미 겪어 버린 것, 이미 상처받아 버린 것,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이었다 ‘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내 마음이 더 편하니까


받았던 상처를 없던 일로 바꿀 수 없다면 비슷한, 혹은 더한 일을 겪게 될 미래의 나를 위한 면역제로 사용하는 게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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