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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시작한 미술, 전시회를 열다

by 소심천
미술학원에 다니게 된 계기는

본격적으로 업무를 하면서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아지고

타고나길 어수선한 정신머리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성인(이 된) ADHD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퇴근을 하고 책을 보면서도 집중력이 채 10분을 가지 못하는 그런 생활을 1년 정도 지속하자 상황의 심각성을 느꼈고

ADHD 치료 목적과 더불어 취미활동 겸 미술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종종 미술대회에 지원하며

비록 수상은 못하더라도 소소하게 그림을 그리는 것에 행복을 느끼기도 하였고

최소 2시간은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이 저주받은 집중력도 어느 정도 향상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전화로 방문상담 예약을 한 뒤 처음으로 그곳에 가는 길에는

혹시 나만 유별난 사람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쉽게 예상가지 않는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을 그 새로운 집단에 대한 설렘이 함께였다


미술학원의 풍경은

이젤과 바닥까지 온통 목재들로 이루어진 작업 공간은

남향으로 낸 창에 해질 무렵 주황빛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아

학창 시절 바라본 방과후 학교 풍경과 유사하였다

그래서인지 이곳이 누군가의 취미 활동을 위한 공간이라는 암묵적 표현이

만약 의도한 것이라면 완벽하게 나의 예술 욕구를 자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유년 시절 방과후엔 보통 학업보다 다른 특기 활동을 즐기니까


미술학원의 아기자기한 풍경과 이제껏 누군가 정성스레 그려놓은 작품들,

생각보다 높은 나이대의 원생분들 그리고 원장님의 귀여운 고양이까지

새로운 환경을 찬찬히 구경할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고, 대신에 작고 말이 많은 원장님이

어반스케치, 인물소묘, 유화, 수채화 중에 하고 싶은 미술 종류를 고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초보자도 그럴듯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말에 혹하여 유화를 선택하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힐링을 하러 왔는데 좀처럼 늘지 않는 솜씨에 스트레스만 늘어갈 순 없으니까

라는 핑계를 대며 단시간에 멋들어진 작품을 내고 싶은 욕심을 꾸깃꾸깃 접어 숨겨두었다


첫 수업

그럼에도 초반에는 색의 원리, 미술의 역사(?) 등 이론수업과

밑그림 그리는 법, 색 조합하는 법과 같은 기본 실습 과정들로

어느 정도 지루한 시기를 보낼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하고 왔는데

첫날부터 바로 도안을 고르고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다

첫 수업날 그린 그림


미술학원 원장님은 원래 성격이 그러신 건지, 원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시는 건지

원생들에게 온갖 호기심을 기반으로 한 이런저런 질문들을 하시는 스타일이고

다른 원생들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며 (사실 작은 공간이라 이미 다 들리지만)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시곤 한다


나는 I처럼 보이지만 사실 E라서 그런 대화들이 불편하다거나 어렵지는 않았고

그렇게 매칭된(?), 마침 그분도 그날 첫 수업이었던 옆자리 언니가

사실 같은 회사, 같은 기숙사, 같은 층이어서 그 이후로도 종종 친하게 지내는 계기가 되었다



전시회 제안과 준비과정

첫 번째 그림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2주(4시간)만에 완성을 하였고

다음 수업을 가기 전에 원장님께서 전시회 제안을 하셨다

미술학원 수강생들 대상으로 참여 신청을 받아

약 2개월, 인당 2개 작품 정도 준비를 해서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회를 하는 것이었다

사실 참여비가 저렴하지 않아서 등록한 지 이제 2주 된 아기자기한 실력으로

과연 경험 삼아 도전을 해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 고민을 하다가

안 하고 후회하기보다는 하고 후회하자라는 생각으로 덜컥 신청을 해버렸다


전시회 작품은 크기가 어느 정도 되어야 하기 때문에

거의 나의 상체만 한 캔버스를 골라 첫 전시작으로 벚꽃 풍경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나는 제일 작은 크기의 캔버스에만 그림을 그린다)

본격적으로 그리는 첫 작품부터 큰+어려운 전시작을 하게 되어서

생각처럼 표현되지 않는 답답함과 큰 캔버스에 한 땀 한 땀 그려 넣는 지루함에

포기하고 싶은 몇 번의 고비를 넘겼고, 그때마다 원장님이 멱살을 잡고 끌어 주셨다


전시회를 하고 난 소감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두 번째 작품까지 완성하고 나자 전시회 당일이 되었다

타지에서 일을 하고 있어 미술학원, 그리고 전시회 장소도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 많은 지인들이 방문해 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와서 내 그림을 감상하고 의견을 주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도 새롭고 감격스러운 경험이었다


그 감동에는 나의 전시회를 축하해 주기 위해 먼 곳까지 와 준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과

부족한 내 그림을 내 친구들, 그리고 다른 원생들의 전시회를 보러 온 또 다른 누군가가

마치 내가 미술관에 가서 어떤 작가의 미술작품을 관람하면서 느끼고 소통한 모든 것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주는 미적 감각과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바, 당시 느낀 감정을 추측하는 그 대화들을

내 작품과 하고 있는 듯한 뒷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실력이 있든 없든, 완성도가 높든 낮든 그곳에 그림을 건 이상

나에게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잠시라도 체험할 자격이 부여된 것이다

그리고 그 체험은 부끄러워서, 기회가 되지 않아서 숨겨두었던 내 예술 욕구를

다시 수면 위로 꺼내어 주었기에 꽤나 만족스러웠다

전시회 작품과 지인들의 방그림록


내가 그린 그림이 작품이 되는 전시회를 연 일은

고민했던 것에 비해 후회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반드시 전시회를 열지 않아도 작품을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과정에 대한 뿌듯함과 결과물에 대한 만족감이 주는 행복이

내가 미술학원에 등록한 의도보다 훨씬 값진 영향을 주어서

지금까지도 1년 반째 계속하여 다니고 있다


미술은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해 준 고마운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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