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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Apr 11. 2021

코로나 감투

학교 총회에서 생긴 일

                                                              


작년 2월에  갑작스러운 이사를 했다.  6시간 거리의 이 곳으로 이사를 오자마자 코로나는 본격적으로 창궐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첫째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낯선 곳에서 중학교 학부형이 된다고 생각하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스타킹은 무슨 색을 신어야 하는지, 실내화는 슬리퍼를 신는지 뒤가 막힌 실내화를 신는지, 신주머니는 가지고 다녀야 하는지. 아이도 물어 볼 사람이 없어서 나에게 소소한 궁금증을 쏟아냈다. 나는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학교로 전화를 걸어 “실내화는 어떤 걸 신나요?”와 같은 질문을 해댔다. 외톨이 엄마라는 티를 팍팍 냈다.


사소한 문제는 순간의 부끄러움으로 어찌 해결이 되었지만, 괜찮은 동네 학원이나 학교 시험 수준 같은 정말 궁금한 문제는 물어 볼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어딜 가서 사람을 사귀고 만나나.’ 답답한 마음을 안고 코로나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어느 날 나에게 반가운 초대장이 날아왔다.

학교 총회 안내장이었다.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1학년 총회 이후 학교 총회는 참석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총회라는 자리는 알고 보니 학부모 대표를 뽑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도 학급 반장 한 번 한 적이 없고, 반장을 하고 싶어 해 본 적도 없는 아이였다. 어쩌다 친구들에게 추천을 받아도 기겁하듯 손사래를 쳤다. 나서는 것이 두려운 소심한 아이였다. 내 아이도 나를 닮아 반장 선거조차도 나가지 않다 보니 내가 총회에 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이가 반장이 되면 엄마가 자동으로 반대표가 되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학급 대표의 엄마도 아닌 내가 일하다가 학교 총회에 갈 이유는 없었다. 총회에 가지 않더라도 참관 수업, 녹색 어머니회 등 엄마가 참여해야 할 자리는 자주 있었고, 둘째 아이까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아는 엄마도 주변에 꽤 생겨서 학교 정보가 부족해질 염려도 없었다. 정보가 부족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보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기 위해 정신줄을 잘 잡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번에 열리는 첫 아이의 중학교 총회는 나에게 꼭 필요한 학교 행사였다. 총회 전 이미 학급 반장, 부반장은 모두 정해졌고, 학부모 반대표도 그들의 어머니들이 수고해 주실 터였다. 총회에 참석한다고 내가 반 대표가 되는 일은 전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간만의 바깥 약속에 약간의 설레는 마음으로 꽃단장을 했다. 천천히 걸어도 5분밖에 안 걸리는 학교에 가기 위해 오랜만에 화장도 하고, 옷도 차려입고, 굽 있는 구두도 꺼내 신으며 몇 번이나 거울 속에 내 모습을 확인했다.   

   

학교에 도착해서 아이의 교실을 찾았다. 학교에 들어가면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든다.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이 있을 리 없는데, 괜히 움츠러들었다. 선생님 같아 보이는 분이 나타나기만 하면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죄인이 된 듯 몸을 움츠리고 아이 교실을 찾았다. 교실 뒷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이미 예닐곱 명의 엄마가 앉아있었다. 엄마들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눈인사를 나눴지만 더 이상 말을 이어갈 말주변도, 뻔뻔함도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맨 뒷자리에 앉았다.    

  

곧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 선생님이었다. 중학교 교실에 앉으니 마음이 중학생으로 돌아가서인지, 40대 아줌마의 본색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젊은 남자 선생님이라는 것만으로 일단 선생님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선생님은 마스크를 썼지만 자신이 웃을 수 있는 최대 한도로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친절하고 상냥한 선생님이 너무 마음에 들어 선생님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끄덕 해 가며 열심히 리액션을 했다. 잠시 칠판에 이름을 쓴다고 뒤돌아 선 선생님의 등줄기에 땀이 흥건하게 베어 있었다.      


선생님은 간단하게 학급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간다는 듯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여셨다.

“총회의 가장 큰 목적은 어머니 반대표를 뽑는 거 알고 계시죠?”

‘네 알다마다요. 근데 그건 반장, 부반장 어머니께서 자동으로 하게 되시는 거 아닙니까?’ 하는 마음의 소리를 담아 다른 엄마들을 쓱 훑어보았다.

‘누가 반장, 부반장의 엄마일까?’

내 자식이 반장, 부반장이라는 뿌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엄마가 누구인지 찾아보았다. 나는 반장의 어머니도 부반장의 어머니도 아니고, 그저 학교가 궁금해서 온 심심한 아줌마라 마음껏 다른 엄마들을 구경하듯 쳐다봤다. ‘어서 반장 어머니, 자랑스러운 손을 드시지요.’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엄마들은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먼 곳을 바라보거나 책상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서 선생님은 “우리 반에 반장, 부반장 어머니는 직장 일로 바쁘셔서 반대표를 맡을 수 없다고 전해 오셨어요. 혹시 이 중에 맡아 주실 분 안계실까요?” 라고 선생님이 말하던 순간. 두리번거리던 나와 선생님의 간절한 눈이 딱 마주쳤다.


“어머니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두리번거리던 내 모습이 마치 반대표를 맡고 싶어서 눈치를 살피던 엄마로 보였나 보다. 리액션도 열심히 했으니 학교 일에 관심 많고 적극적인 엄마라 오해 할 만 했다. 아이 알림장 한 번 안 살펴보는 엄마라는 걸 선생님은 아실 리 없었다.      


“네? 네? ”


학교 다닐 때 모르는 수학 문제에 지명 당한 사람처럼 다급한 마음에 말까지 더듬었다.


“저는 이제 이사 온 지도 얼마 안 된 전학생 엄마예요. 아는 분도 아무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내 얼굴은 보나마나 벌겋게 달아 올랐을 것이다.


“아이고, 그럼 더 좋지요. 엄마들도 많이 사귀시고, 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는 기회네요. 그리고 귀찮은 일은 제가 다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편하게 이름만 올려 놓는다 생각하세요.”


라고 말씀하시는데, 등줄기에 땀이 흥건한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아, 네”


나는 고분고분한 학생이 되어 선생님 말씀에 순종했다.   

   

“그럼 어머니는 반대표 어머니들이 모여 계시는 2층 도서관으로 가세요.”


선생님은 어려운 숙제를 해치운 듯 개운한 표정으로 나에게 지시했다. 나는 순종적인 학생답게 “네”하고 의자에서 발딱 일어나 뒷문을 조용히 열고 반대표가 모여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감투 쓴 것이 마흔 넘어 처음이라 어리둥절했다. 2층의 도서관 문을 여니 선생님 말씀대로 반대표 엄마들이 한가득 모여있었다. 나처럼 이사 와서 심심해서 총회 왔다가 얼떨결에 반대표까지 된 엄마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 아이가 반장이라 반대표 엄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엄마들은 인기 많은 내 자식 덕분에 억지로 끌려왔다는 힘든 티를 낼 자격이 있다. 존재감이라고 전혀 없는 전학생 아이의 엄마는 조용히 그런 엄마들을 또 구경하고 있다.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학생회장이라는 엄마가 학년 대표 엄마를 뽑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것도 뽑는구나. 누가 되려나’

 나는 또 두리번거렸다. 이번에는 나와는 절대로 상관없는 일이 분명하다 확신하고 마음껏 두리번거리는데,

“거기, 머리 짧으신 어머니 1학년 대표 부탁 드려도 될까요?”


두리번거리다 또 걸렸다.

학년 대표라니 생각지도 못한 불똥이 또 나에게 떨어졌다. 나는 자포자기 하는 심정이 되어“네”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다른 엄마들은 나를 보며 이전 학교에서 치맛바람꽤나 날리던 아이의 엄마가 이사 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전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심심해서 학교에 온 것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아무도 나에게 왜 왔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학부모 반대표, 학년 대표를 맡고 1년을 보냈다. 코로나로 팔자에 없는 감투를 쓰고 학교 행사와 회의에 참여했다. 학교 일정과 행사는 1년 내내 혼돈과 차질의 연속이었지만, 학부모 대표로 학교에 가야 할 일은 많았다. 급식 문제, 수업 일정, 체험 학습, 교복 문제 등 학부모가 학교에 가서 결정에 관여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심지어 딸이 등교한 날보다 내가 학교에 간 날이 더 많을 정도였다. 학부모들을 사귀고, 여러 가지 몰랐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점은 좋았지만, 나는 앞에 나서기보다는 뒷전에서 구경만 하는 쪽이 역시나 적성에 맞았다.    

 

 학교 급식실에서 밥도 먹어 보고, 교장실에 가서 커피도 얻어 마셔봤다. 입시 전문가 뺨치는 엄마들에게 몰랐던 정보도 많이 들었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선생님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성실한 직장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학교라는 공간에 들어서면 자동 울렁증이 생기는 사람이었는데 학교는 무서운 곳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신경쓰고 있는 따뜻한 공간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코로나 덕분에 감투도 써봤고, 사람도 사귀었고, 학교 일도 해 봤다. 코로나로 얻은 것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코로나와 결별하고 싶다.


올해는 학부모보다 아이들이 등교하는 날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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