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넘게 지방에서만 살았던 나에게 ‘경복궁’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그저 출근길에 보이는 명소, 동네에 있는 유명한 관광지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방 사람인 나에게 경복궁은 이름만으로 설렘을 준다. 500년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중심에 서 있는 궁궐이자, 지금은 첨단 메가시티인 서울의 중심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타임캡슐 같은 신비스러운 곳이다.
지인들과 미세먼지 하나 없는 아주 드문 서울의 봄날에 설렘을 가득 안고 경복궁을 방문했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이 없을 것이라 예상하고 들어갔는데, 웬걸 현장 체험학습을 나온 중고등학생들로 궁은 시끌벅적했다. 사춘기 호르몬 뿜어내는 아이들의 왕성한 에너지에 절대로 눌리지 않겠다는 듯 인왕산과 북악산이 인자하게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유적지는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곤 하는데, 이날의 경복궁도 이전의 느낌과 달랐다. 유달리 파란 하늘 아래 드리워진 기와지붕이 더욱 멋스럽게 다가오는 날이었다. 지붕 끝에 매달린 단청도 선명하게 빛났다.
경복궁 도입 부분인 근정전부터 우리 일행은 ‘예쁘다’를 연발했는데, 경회루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멈춰 서고 말았다. ‘예쁘다’라는 말로는 부족한 위엄과 근엄함이 서려 있는 장중한 건물 앞에 할 말을 잃었다. 임금님은 경회루에서 연회도 하고, 명나라 사신도 접대했다고 한다. 술은 술술 넘어가고 노래는 저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 곳에서 공적인 업무만 하시진 않았을 테고, 기생도 만나고 연애도 하셨겠지. 고민이 있을 땐 넓은 연못을 보며 근심을 달래기도 하셨을 것이다.
경회루 주변에 심어진 수양 벚나무 꽃은 이미 다 져서 아쉬웠다. 수양 벚나무는 효종이 심은 것이었다고 한다. 효종은 아버지 인조가 병자호란으로 치욕을 겪었던 것을 복수하기 위해 북벌 정책을 계획했다. 벚나무 껍질은 화피라고 하여 활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된다. 전쟁에 사용할 활을 만들 목적으로 수양 벚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풍광 뒤에 효종의 한이 서려있었다. 나무를 심어놓고 보니 꽃이 너무 아름다워 활을 만들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더군다나 재위 기간이 10년(1649~1659)밖에 안됐으니 수양 벚나무가 아름다운 풍모를 갖추기도 전에 돌아가셨을 것이다. 일찍 돌아가신 것은 안타깝지만 경회루의 아름다운 수양 벚나무가 활이 되어 전쟁에 쓰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 당시 경회루는 일반 백성들은 아마 상상도 못 할 아름다운 건물이었을 것이다. 요즘 같으면 123층의 롯데월드타워에 비견될 만큼, 아니 그 이상의 건물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현존하는 목조 건물 중 최대 규모라고 한다.
연산군은 이 아름다운 건물에서 ‘흥청’이라는 기생들을 불러 주색과 여색을 탐했다. 이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백성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연산군이 사랑했던 여자 장녹수와도 경회루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예상하지 못한 채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중종반정으로 장녹수는 목을 베는 참형에 처하고, 시체를 길에 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시체에 돌을 던지며 욕을 했다고 하니 백성의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가 1년도 안돼 울화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연산군은 죽어가면서 경회루에서의 즐거운 한때를 그리워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