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는 두 개의 연못이 있는데, 경회루를 지나 경복궁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향원지’라는 연못이 나온다. 이곳은 고종과 민비의 사연이 있는 곳이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힘에서 벗어나고자 건청궁을 따로 짓고, 그 옆에 향원지를 만든다.
향원지는 조선의 정자치고는 조금 이국적이다 싶은 정자가 있는데 그곳의 이름이 향원정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향원정이 향원지와 조금 동떨어진 느낌의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향원정 옆의 철 다리는 조선의 궁궐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복원 과정의 실수인가 싶었는데, 고종이 러시아의 건축가에게 직접 의뢰한 철 다리라고 했다. 참으로 특이한 심미안이다. 고종은 무작정 외국 문물을 동경했던 것일까? 어떤 자리에 뭐가 어울리는지 고민도 하지 않고, 돌보다는 철이 좋지, 하며 철 다리를 명령했나 싶다. 고종 임금님이 외국 신문물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하니, 향원정도 고종 임금님의 이국적 취향의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 눈에는 뭔가 어색하긴 해도 향원정은 사이좋은 고종과 민비 부부가 산책하고 담소를 나누었던 장소였다. 연못의 물고기에게 먹이도 주고, 향원정에 앉아 맛있는 간식도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전구 불빛이 향원지 주변을 밝혔을 때는 신기함과 기쁨에 벅찼을 것이다.
그렇게 고종 임금님에게 뜻깊었던 향원지는 민비가 일본 자객에게 시해되고, 끔찍하게 훼손된 시신을 불태운 유해를 버렸던 곳이기도 하다. 임금님은 충격을 받고 두려움에 떨다 결국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 급변하는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약소국의 임금으로서 어쩔 수 없던 일이었을까? 임금님의 최선이었을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다가도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문 기간이 2년이나 된다니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너무 무책임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임금이 궁을 떠나버린 나라는 얼마나 만만하고 우스웠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러시아와 일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을 부지런히 갉아먹는다. 지하자원을 채굴하고, 채벌해 간다. 열강의 손아귀에 국토가 유린당하는데도 임금님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을까 싶다.
결국 고종은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나라가 거의 넘어가기 직전 건청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환궁을 한다. 근처에 러시아 공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고종의 안위를 보호받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다.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다. 역사를 배우면서 나는 이 부분을 늦어도 너무 늦은 뒷북이라고 생각했지만, 책에는 항상 좋은 말만 적혀 있었다. 고종이 우리 나라의 자주성을 보이기 위한 노력이라며 예쁘게 포장해 주었다. 하지만, 자주적이 되고 싶었으면 러시아 공사관에 2년이나 있어서는 안되는 거였다.
나는 향원지에서 걸음을 멈추고 ‘고종’이라는 임금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어떤 사람이었을지 생각을 해 보았다. 경복궁 내에 750개나 전구를 밝힐 만큼 스케일 크게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그 시대 커피 맛을 알았던 임금은 호기로워 보인다. 정치적 문제로 아버지와 첨예한 갈등을 겪으며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을 만큼 칼도 울고 갈 단호한 성격이었다.
그런 걸 보면 2년간이나 러시아 공사관에 있을 만큼 유약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2년간의 러시아 공사관에서의 피신은 너무했다 싶다. 그만큼 민비에 대한 정신적 의존도가 높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임금의 의무와 책임도 부인의 죽음 앞에서는 한낱 허상일 뿐일 만큼 애처가였다고 이해해야 하나.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씁쓸한 뒷맛은 감출 수가 없다.
향원지 위로 펼쳐진 파란 하늘을 보며 임금님께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냐고. 나라보다 부인이 더 중한 임금의 백성은 누구를 믿고 살아야 했느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