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로 Sep 24. 2022

어느 이방인의 기쁜 마음 '딜쿠샤'

     


경희궁 자이를 내려다보며 언덕길을 쭉 올라갔다. 아파트 이름 앞에 조선의 궁 이름을 갖다 붙이니 네모 반듯한 콘크리트 덩어리도 어쩐지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아파트 옆길은 서울답지 않게 한적하면서도 적당히 경사가 있어서 운동하기 좋았다. 경희궁 자이를 지나 성벽을 따라 길을 올라갔다. 홍난파 가옥을 지나 10여분을 걸었다. 숨이 턱에 차 오르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먼저 웅장한 은행나무에 놀랐고, 그다음으로 옆에 비스듬히 서 있는 2층의 붉은 벽돌집에 시선을 뺏겼다.  ‘딜쿠샤’를 만났다. 딜쿠샤... 낯선 이름이지만 부르는 순간 좋은 느낌이 입 끝에 맴돌았다.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딜쿠샤’는 서울 종로구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다.

요즘 지어진 신상 카페 같은 느낌의 외관을 가진 ‘딜쿠샤’는 일제 강점기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라는 사람이 살던 집이다. 집 앞에 수령이 500년이나 되는 은행나무가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길을 지나가는 누구라도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는 신비로움이 있었다.      


앨버트 테일러 부부는 1924년에 딜쿠샤를 완공하였다. 한국에서 추방되기 전인 1942년까지 테일러 부부는 이곳에서 아들을 낳고 살았다. 우리나라는 당시 일제 강점기로 전혀 기쁘지 않았던 암울의 시대인데, 미국인 부부는 ‘기쁜 마음’이라는 이름의 궁전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미국인 앨버트라는 사람은 왜 여기다 이런 집을 지었을까?     


앨버트 테일러는 조선에 금광사업을 하기 위해 들어온 사업가였다. 조선에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열강의 수탈 대상이 되던 때에 앨버트는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위해 조선에 들어왔다. 앨버트는 조선에서 부를 축적하기 위해 들어왔지만, 우연히 조선의 독립운동에 관여하게 된다.      

1919년 2월 28일 테일러 부부의 아들이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난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이다. 아들과 아내를 보기 위해 병원에 온 앨버트는 우연히 침대 속에 감춰져 있던 종이 뭉치를 발견한다. 그것은 ‘독립 선언서’였다. 왜 하필 앨버트 아들이 누워 있던 병원 침상에 독립 선언서가 숨겨져 있었던 것인지는 모른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이 묘한 사건은 지금 우리에게 딜쿠샤가 남아있게 된 이유를 제공했다. 연합통신(AP) 통신원이기도 했던 앨버트는 조선의 3.1 운동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여 독립 선언서와 함께 동생 윌리엄에게 전달하였다. 윌리엄은 일본 도쿄로 가서 전신으로 미국에 보냈다. 독립선언서가 국외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조선에 왔던 그이기에 돈만 벌어서 조선을 휙 떠나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앨버트는 나라를 빼앗긴 힘없고 가난한 조선 사람이 가여웠나 보다. 단순한 측은지심만으로 조선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리려고 애쓴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조선 독립을 돕고자 하는 측은지심 이상의 의협심이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테일러는 감옥에 수감되기까지 했고 결국은 조선 총독부에 의해 1942년 추방되고 만다.      

정도 고생을 했으면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앨버트는 미국에 가서도 조선을 늘 그리워했다고 한다. 딜쿠샤가 있는 곳을 고향으로 생각했고, 딜쿠샤로  돌아갈 날을 꿈꾸던 앨버트는 미국에서 1948년 6월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만다. 하지만, 생전에 그는 한국에서 묻히고 싶다는 뜻을 아내에게 말했고, 그 뜻을 받들어 부인이 유해를 한국에 가지고 와 한국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하였다.      


1945년 조선은 독립을 맞았지만, 6.25 전쟁과 격랑의 근현대사를 거치게 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궁전 같았던 딜쿠샤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폐가가 되고 만다. 딜쿠샤는 거처가 없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사는 터전이 되었다. 딜쿠샤는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품었다.      


모두에게 잊힌 듯싶었던 딜쿠샤는 테일러의 자손들에 의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지금은 다시 1923년 테일러 부부가 살았던 모습으로 복원되어 2021년부터 관람객을 받는 문화재가 되었다. 테일러 손녀가 기증한 자료들 덕분에 원래의 모습과 거의 흡사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딜쿠샤에는 생전에 테일러 부부의 모습과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무엇보다 메리 테일러 부인이 그렸던 조선인 초상화와 조선의 풍경화가 눈길을 끈다. 그 그림들을 보면 그녀가 조선을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녀는 조선인의 표정, 의복, 눈빛까지 아주 자세하게 그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릴 수 없는 그림들이다. 싫어하는 사람을 그토록 오랫동안 보면서 그릴 수는 없다.

그녀가 그린 조선의 풍경도 식민지 모습 같지 않게 평화로운 모습이다. 수탈당하지도 않고, 박해받지도 않는 나라의 백성인 것처럼, 메리 테일러 부인의 그림 속 조선은 아름답다. 그것이 그녀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울 한복판에 일제 강점기 미국인이 살았던 집 '딜쿠샤'가 있다. 젊고 능력 있었던 이방인은 커다란 은행나무가 마음에 들어 그 옆에 이층 벽돌집을 지었다. ‘기쁜 마음’이라는 이름과 꼭 어울리는 집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딜쿠샤는, 오래전 거기에 살았던 이방인의 기쁜 마음을 전해주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2. 경복궁 향원지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