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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Dec 31. 2023

암진단 한 달 후, 그래도 웃는다

안녕, 2023년



일주일 5회 이상 라면 먹기,

일주일에 3일은 하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기,

채소는 멀리하고 고기만 먹기,

매일 자기 전 맥주 마시기,

물대신 커피 수시로 마시기,

새벽 한 시 넘어 자기,

절대로 숨찰 때까지 뛰거나 걷지 않기.


이렇게 살면 암에 걸린다.


불과 한 달 전까지 내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암 예방 수칙과 정반대의 생활을 20여 년간 꾸준히 . 매일 인스턴트를 먹고, 운동은 하지 않고, 술을 즐기고, 수면 시간은 불규칙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서 살았더니, 결국 나의 면역 세포는 암세포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최악의 생활습관으로 살면서도 마흔 중반에 암이 걸렸으니, 이만하면 내 면역세포도 최선을 다했다고 봐야 한다.


소소한 행복을 핑계 삼아 안 좋은 줄 알면서도 계속했던 생활 습관이었다. 이 정도의 행복조차 누리지 못하는 시기가 찾아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입방정을 떨다 받은 벌인 지, 당분간 혹은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앞으로 계속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술을 마시고 싶어 미치겠는데 고도의 인내심을 발휘해 참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존 본능인지, 신기하게도 암진단을 받자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싹 달아났다.


한 달간 생활습관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암이 아니었으면 평생 생각만 하다 끝날 일이다. 매년 새해 계획에 넣었지만, 실천은 힘들었던 일이 암진단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맥주도 끊고, 잠도 12시 전에는 자려고 노력한다. 헬스장에서 주 3일은 땀을 흘리며 운동한다. 매일 아침 샐러드를 챙겨 먹고, 커피는 하루 딱 한잔만 마시고, 나머지는 허브티를 마신다.


하지만, 몸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성인이 되면서부터 20여 년간 쌓인 나쁜 습관의 성은 견고하기만 하다. 여전히 내 몸은 젖은 솜처럼  무겁고, 소소한 행복마저 뺏겨서 기분도 별로다. 운동을 하고 오면 하루종일 널브러져 있어야 하고, 커피를 안 마시니 하루종일 정신도 몽롱하다. 약이다 생각하고 샐러드를 우걱우걱 씹으니, 정말로 샐러드에서 약맛이 나는 것 같다.

 나 같은 의지박약아가 암이 아니었으면 운동을 하고, 술을 끊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여전히 낮에는 스트레스에 짓눌리면서 일을 하고, 밤에는 술로 마음을 달래는 생활을 이어갔겠지. 지금이라도 암을 발견해서 생활 습관을 바꿀 수 있으니 100살까지 유병장수 할 수 있을 거라 정신 승리해 본다.


아무리 정신 승리를 하려고 해도 암에 걸리지 말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내 제사상에 술과 커피를 올리라 말해둘 만큼 좋아하는 것들과 멀어져야 하니, 삶이 맹숭맹숭해진 느낌이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내 목에 그어질 칼자국을 상상하면 우울해진다.


이 와중에 산정특례가 적용된 병원비 영수증에 900원이 찍힌 걸 보니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병원도 안 가는데 의료보험료가 너무 많이 나와 아까워 죽겠다던 말도 이제 쏙 들어갔다. 중증 환자가 되고 나니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불행 사이로 순간순간 삐져나오는 행복의 끄나풀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주의를 살핀다. 불행의 색깔을 입힌 행복을 찾아 주머니 속에 꼭꼭 넣어둔다. 나쁜 일이 일어났지만 순간순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암에 걸린 큰 성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세상에 암보다 더한 난치병이 많다. 갑상선암만 하더라도 암 중에서는 귀여운 암으로 통한다. 환자로 꽉 들어찬 대형 병원에 가보니, 이 정도 병에 걸린 건 운이 좋다는 생각마저 든다. 암진단을 받을 때만 해도 온 세상이 정지되는 느낌이었는데,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수술을 앞둔 지금, 수술 후기를 읽어보며 겁에 질렸다가 안도하기를 반복하는 일상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

2023년의 마지막날이다. 새해에도 힘든 일이 많겠지만,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 2024년도 웃을 일을 잘 찾아내며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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