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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Dec 18. 2023

암은 고쳐도 내신은 못 고친다

K-고딩 엄마는 시험기간에 암소식을 알리지 않는다



"엄마, 요새 왜 술 안 마셔?"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고1 딸이 학원에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으며 물었다. 딸이 학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쯤, 나는 항상 맥주 한잔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며 딸을 맞이했다. 1년 365일, 몸이 아주 안 좋은 날을 제외하고는 맥주 한 캔씩을 보약마냥 빠뜨리지 않고 복용하는 엄마였는데, 술을 안 마시니 이상했던 모양이다.

"그냥 안 마시고 싶어서."

"왜 안 마시고 싶어? 갑자기?"

"날도 춥고 맥주가 안 당기네."

나는 어물쩍 위기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딸은 오늘따라 집요했다.

"일도 그만두고, 술도 끊고, 갑자기 안 하던 운동도 다니고. 이상하잖아. 엄마, 암이라도 걸렸어?"

딸의 웃음기 없는 표정에 두려움과 궁금함이 뒤섞였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언젠가는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기말고사 기간! 시험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싶은 K-고딩의 엄마는 암을 필사적으로 숨기기로 했다. 어제도 수학 시험을 다 찍겠다고 엄포를 놓던 아이인데, 밝히는 순간 이번 시험은 돌아올 수 없는 내신의 강을 건널 것이 분명했다.


"암은 아니고, 갑상선에 혹이 있어."

"혹? 무슨 혹?"

'혹'이라는 단어에 딸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순식간에 후드득 떨어졌다.

"그거 놔두면 암되는 거 아니야? 빨리 떼야지. 왜 안 떼고 있어!"

밥을 먹다 말고 딸은 엉엉 울어버렸다. 예상보다 격한 전개가 당황스럽다.

"이건 물혹이라서, 좀 있다가 떼도 된대. 나중에 떼러 갈 거야. 걱정 하나도 안 해도 돼. 쌍꺼풀 수술보다 더 쉬운 수술이야."

쌍꺼풀 수술을 경험한 딸의 눈높이에 맞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하루 남은 기말고사를 무사히 넘기고 싶은 K-고딩의 엄마는 필사적으로 암을 숨기며 딸을 안심시켰다. 딸은 밥을 먹다 말고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검색을 했다. 눈은 스마트폰 액정에, 손은 연신 휴지로 눈물, 콧물을 닦기 바빴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이들에게 암선고 폭탄을 터뜨려 속 썩이던 모든 것을 회개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물혹'이라는 단어에도 딸이 저렇게 자지러지게 놀라니 되려 내가 폭탄을 맞은 것 같다.


"엄마, 아프지 마. 엄마 아프면 안 돼. 이번주에 꼭 혹 떼러 가. 그렇게 두면 암될지도 모르잖아."

스마트폰 검색으로 알아본 '갑상선 물혹'에도 안심이 안되는지, 딸은 여전히 꺽꺽 울었다. 딸을 보니 나도 울컥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 아직 기말고사가 남았지 않은가. 여기서 무너져 둘이 끌어안고 울면 끝장이다. 암은 고칠 수 있지만, 무너진 내신은 고칠 수 없다.

"혹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병원 진료가 좀 밀렸어. 당장 떼러 갈게.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딸 앞에 눈물 닦은 휴지가 수북이 쌓였다. 암선고를 받았던 나보다 딸이 더 많이 울었다. 내가 아프다고 이렇게 애달프게 울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딸의 눈물이 마음 아프면서도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암소식을 알렸을 때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슬퍼하고 위로해 주었다. 울어주기도 하고, 선물을 보내주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센척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딸처럼 대성통곡한 사람은 없었다. 키도 몸무게도 나를 넘어선 지 오래라, 다 컸다고 생각했다. 숙식 제공하는 하숙집 아줌마의 역할만 몇 년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딸은 엄마의 부재가 두려운 아이였다. 마흔 넘은 나도 엄마가 이 세상에 안 계신다고 생각하면 두려운데 미성년 딸은 오죽할까.


딸은 진정이 되었는지, 하루 남은 시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부은 눈으로 책이 눈에 들어올까 싶었지만, 마음을 다 잡고 책상에 앉은 딸이 기특했다. 언젠가는 딸에게 암에 걸린 걸 말해야 할 것이다. 시험기간은 피했으니, 다른 좋은 날을 잡아봐야지. 고등 딸에게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말하기 좋은 날은 언제일까. 있기나 할까 싶지만, 그날이 와도 울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한다. 내가 울면 딸이 더 슬퍼할 테니까.


딸아, 갑상선 암은 의사한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수술일 거야.

걱정 말고 너 갈길 열심히 가렴. 엄마는 금방 다 나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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