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모르는 사랑하는 내 고슴도치
"내일 수학 시험은 몇 번으로 찍을까?"
"누나, 조삼모사로 해. 조금 모르면 3번, 아예 모르면 4번."
고1, 중1 남매가 떡볶이를 앞에 두고 주고받는 대화를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수학에 지금까지 쳐들인 돈이 얼만데, 찍는다는 소리를 해!!! 어휴, 스트레스! 이러니까 내가 암이 안 걸리고 배기겠어!'
목구멍 끝에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애써 눌러 삼켰다.
아이들에게 아직 암에 걸렸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수학 시험을 몇 번으로 찍을지 고민하는 딸에게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면, 수학뿐만 아니라 풀만한 다른 과목들도 다 찍어버릴 것 같다. 그건 암보다 더 무섭고 괴롭다.
지금 기말고사 기간인 고1 딸은 세상을 포기한 듯한 말을 자주 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놓는다.
"자퇴를 왜 그리 많이 하는지 알겠어."
"나는 정시 파이터야."
"우리 학교는 내신 따기가 헬이야."
요즘 고등학생들 내신 따기 힘들어 자퇴도 많이 하고, 정시에 올인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남들 얘기로만 듣고 싶은 이야기를 자꾸 딸이 자기 입으로 이야기하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교육과 입시의 구조적 문제는 늘 있었고, 그 와중에도 잘하는 아이들은 잘만 한다. 올해 수능도 불수능이라고 난리 더니 만점자도 나오고 만점에 근접하는 아이들도 많다. 딸이 그런 괴물 같은 아이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고, 내 속 뒤집는 말만이라도 제발 하지 말고 묵묵히 해 주면 좋겠다. 입시가 힘든 거 누가 모르는가? 엄마가 암 걸렸으니 제발 속 긁는 말이라도 안 할 수 없니?
공부하기 싫다, 학원 가기 싫다는 말을 숨 쉬듯이 하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암 걸렸다고 말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면서 하나도 알아서 하는 게 없는 아이들이 엄마의 암소식에 달라질까?
암이라고 말하지 말고 간단한 혹 제거 시술이라고 말할까도 싶었지만, 암이라고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철 좀 들지 않을까 싶은 기대도 있기 때문이다. 이왕 암에 걸린 거, 아이들을 좀 더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엄마가 암 걸렸다고 충격받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집안 청소도 잘하고, 밥도 투정 없이 맛있게 먹으면, 나는 내가 암 걸린 걸 행복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이기적이고 얄팍한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암'이라는 무기를 휘두르며 자식 사랑과 자식 학대 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하는 나를 본다.
한 달에 50만 원씩 수학 학원에 돈을 갖다 바치고, 수학을 몇 번으로 찍을지를 태연하게 물어보면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암은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며, 엄마가 스트레스받지 않도록 조심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아, 학원비를 생각하니 다시 스트레스 지수가 용솟음치는 것 같다. 생각하지 말자. 뼛속까지 문과인 내 머리 닮은 탓이지, 누굴 탓하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암에 걸렸다고 말하기가 힘들다. 오랜만에 연락온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 암 걸렸어.'라는 말이 나오는데, 아이들과 부모님에게는 입이 안 떨어진다. 말을 할지 말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울면서 말해야 할지 웃으면서 말해야 할지, 전화로 말해야 할지 만나서 말해야 할지.... 각종 시뮬레이션을 돌리다가 결국은 폭발하듯 말하게 될까 봐 두렵다.
암에 걸리면 나같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도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게 된다. 그 시간 중 나를 가장 빛나게 해 준 사람은 아이들이고, 아이들이 없었으면 나는 더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세상에 태어나 아이들과 만난 일보다 벅차게 행복한 일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그런 아이들에게 공부 좀 못한다고 암으로 겁박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는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가. 공부는 유전자 탓이 분명한데 말이다.
오늘 딸이 수학을 다 찍었다고 말해도 (열불 터지겠지만) 안아줘야겠다. 엄마 수학 머리가 꽝이라 정말 미안해 하면서. 물론 마음 속으로만.
다른 좋은 것도 많을 텐데, 너는 꼭 그런 것만 닮더라. 사랑하는 내 고슴도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