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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May 11. 2021

항상 조심합니다만

생리에 관한 불편한 진실


  

조카 돌잔치 날이었다. 나는 하객으로 앉아 조카의 성장 영상을 보며 박수도 치고, 차려진 음식을 먹으며 일행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품 추첨에 걸리기를 기대하며 사회자의 목소리에 귀를 세우고, 웃고, 손뼉 치며 그 시간을 즐기는데 열중했다. 

잠깐 일어서는 순간, 누군가가 살며시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기. 실수하신 것 같아요.”

“네?” 

주책없이 너무 즐겼다는 뜻일까, ‘실수하신 것 같다’라는 여자의 말이 어리둥절해서 멀뚱히 쳐다보았다. 

“화장실 한 번 가보세요.” 마치 자기가 실수한 것처럼 난감해하는 여자의 표정을 보고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불길한 예상은 항상 적중한다. 흰 정장 바지에 선명한 빨간 피가 묻어 있었다. 생리량이 많은 날인데도 멋을 부리기 위해 흰 바지 정장을 입은 것이 화근이었다. 생리하는 날 멋 따위는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나는 매달 생리할 때마다 실수한다.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실수를 하고, 누워있다가도 실수를 한다. 특히 잘 때 실수를 제일 많이 한다. 다른 사람에게 실수가 들통나면 민망하고, 나 혼자 알아차렸을 때도 기분 나쁘기는 마찬가지다. 30년째 매달 하고 있는데도 매번 당황스럽다. 할 때가 됐는데 안 하면 언제 터질까 불안하고, 불시에 터져 나왔는데 대비책이 없으면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중학교 2학년 딸이 이제 생리를 시작했다. 요즘 아이 치고는 늦게 시작한 편이다. 빠르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도 시작한다고 하니, 그 아이들이 ‘실수’하며 눈물을 글썽일 모습에 내가 아찔해진다. 

내 딸은 앞으로 생리 때마다 ‘실수’ 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 것이다. 여행을 갈 때도 생리하는 날짜와 겹치지 않도록 신경 써서 날짜를 잡을 것이고, 물놀이 계획이 잡히면 생리를 미루는 호르몬 약을 먹을 것이다. 생리에 수반되는 복통, 요통, 두통은 진통제에 의지하며 견뎌낼 것이다. 즐거워야 하는 날 ‘실수’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고민할 딸의 모습이 그려져 마음이 편치 않다.     


누군가는 아이가 생리를 시작하면 생리 파티를 해 주라고 했다. 파티를 하면 생리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을 심어 줄 수 있고,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소중한 몸이 된 것에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이 생리 파티를 안 해 줘서 매달 하는 생리에 내가 고통받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생리의 의미는 분명 가치 있는 것이지만, 생리에 수반되는 육체적 고통은 파티보다는 위로가 필요하다. 나는 생리 때마다 지독한 편두통에 시달린다. 운이 좋은 달은 진통제 한 알로 끝이 나지만, 어떤 달은 열 알을 먹어도 가라앉지 않고 생리 기간 내내 나를 괴롭힌다. 매달 겪는 편두통에 생리 날이 다가오는 것이 무섭기까지 하다. 일을 하면서도 생리혈을 옷에 묻히는 ‘실수’를 하게 될까 봐 수시로 일어나 화장실에 가본다. 다른 사람한테는 속 시원히 알릴 수 없는 고통이다. 내 고통이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단정하지 못한 사람의 ‘실수’ 일뿐이니까 말이다.      


생리를 이마로 하는 상상을 해본다. 생리 때마다 이마에 붕대를 돌돌 감고 일을 한다면 어떨까? 붕대 밖으로 피가 흘러나온 여자에게 ‘실수했네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수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조심하지 아니하여 잘못함. 또는 그런 행위’라고 나온다. 생리하는 날 조심하지 않는 여자는 없다. 종일 생리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조심하지 않아서 ‘실수’하는 것이 아니다. 생리 때도 편히 쉴 수 없는 상황과 ‘칠칠치 못한 여자’라는 시선이 생리하는 여자를 ‘실수’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피 흘리면서도 ‘실수’ 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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