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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May 06. 2021

15년 동안 무사히 부부로 살아가는 방법

남자는 칭찬에 목말라 있다



 

나는 남편에게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 내가 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아이들 이야기다.  아이가 없다면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매일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며 연예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맛집? 좋은 여행지? 서로가 누리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며 풍요로운 삶을 채우고 있을까? 가끔은 궁금하다.   

 

결혼 16년 차 남편이 주로 하는 이야기는 회사 이야기이다. 매번 진지하게 회사 동료와 상사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나에게 해 주지만, 나는 듣고 바로 잊어버린다. 열심히 들어주는 척 하지만, 남편의 회사 동료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외워지지 않는다. 지루한 남편의 회사 이야기를 듣다가 지칠 때면 나는 남편에게 산책을 가자고 한다.

    



남편과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같이 산책을 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손을 잡고 산책을 하므로 다른 누군가가 보면 꽤 다정한 부부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이야기가 지겨워 밖으로 나왔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손을 잡고 나란히 산책하면서 듣는 남편의 회사 이야기는 집에서 듣는 것보다 훨씬 들어줄 만하다. 내 눈앞에는 강아지도 보이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꽃도 보이고, 다른 산책객들도 보인다.  남편의 얼굴을 계속 보면서 리액션 해 주지 않아도 된다. 그날의 햇살, 바람, 냄새를 느끼며 듣는 남편의 이야기는 똑같은 이야기라도 새롭게 들린다.    

 

우리의 산책 코스는 정해져 있다. 우리 동네에는 걷기 좋은 산책길이 있다. 길가에 즐비한 나무들이 계절마다 각양각색의 옷을 갈아입는 멋진 길이다. 그 길을 따라 쭉 가면 도서관이 나온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도서관이다. 나는 다 읽은 책을 반납하기 위해 책을 챙겨 산책을 나선다. 도서관에서 책을 반납하고, 빌리고 싶은 책을 고른다. 남편은 책을 전혀 읽지 않는 무독서가이므로 자신이 빌리고 싶은 책은 없다. 결혼해서 15년 동안 내가 아는 한 남편은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낮은 우리나라 성인 독서량의 평균을 왕창 갉아먹는 사람이다. 남편이 책을 전혀 읽지 않아도 같이 사는데 큰 지장은 없는지 나는 16년 째 이 남자와 살고 있다. 심지어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남편은 내가 책 읽는 것을 말리지 않으니, 나도 남편에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서로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시키지만 않아도 싸울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남편이지만, 예상외로 도서관에 데려가면 상당히 쓸모가 있다. 내가 빌리고 싶은 책의 청구기호를 종이에 적어서 남편에게 주면 기똥차게 빨리 찾아온다. 이상하게 나는 청구기호 근처에서 맴돌기만 할 뿐, 찾는 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사서한테 미안해서 찾아달라는 말도 못 하고, 내가 빌리려고 했던 책의 청구기호 주변에 있는 책을 마지못해 빌려오는 때가 부지기수다. 남편은 도서관도 혼자서 가 본 일이 없고, 책도 전혀 빌려보지 않았다. 남편에게 청구기호를 빨리 찾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이 기특해서 칭찬을 아낌없이 해 준다. 내가 남편에게 하는 최대한의 칭찬이란 놀란 척 눈을 똥그랗게 뜨고 “오!”라는 감탄사 한마디를 뱉어 주는 것이다. 그러면 남편은 으쓱해져서 “내가 이런 건 참 잘해.”하면서 나에게 듣지 못한 칭찬을 자신이 마저 덧붙인다. 나는 또다시 남편의 손에 청구기호를 쥐여주고 다시 남편을 책이 빽빽한 서재 앞으로 보낸다. 마치 원반을 물어 온 개에게 더 멀리 원반을 던지는 주인처럼.


남편은 아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책장 앞으로 씩씩하게 나아간다. 책 찾기 대회에 나간 어린이처럼 열심히 아내가 주문한 책을 찾는다. 아까보다 더 빠르게 책을 찾아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해 주겠다는 일념이 엿보이지만, 나는 모른척한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남편은 당당하게 책을 들고 내 앞에 선다. ‘빨리 칭찬해 줘’라고 말하는 그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다시 한번 짧고 굵게 “오!”라는 감탄사를 투척한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남자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가 함께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남자는 청구기호에 적힌 책의 위치를 잘 찾고, 책이 잔뜩 들어있는 무거운 가방을 들어줄 만큼 힘이 좋기 때문이다.



무사히 책 찾기 임무를 마친 남편과 내가 향하는 두 번째 코스는 떡볶이집이다. 도서관에서 10분쯤 더 걸어가면 나오는 떡볶이집이다. 우리는 여기서 매운 떡볶이 1인분, 안 매운 떡볶이 1인분, 순대 1인분, 튀김만두 1인분을 시킨다. 우리 부부의 산책길에서 만난 떡볶이집은 매운 정도가 5단계나 있는 고마운 떡볶이집이다. 우리는 가장 안 매운 떡볶이와 아주 매운 떡볶이, 두 가지 떡볶이를 포장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 집에는 산책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엄마, 아빠보다 그 손에 들려있는 떡볶이 봉지를 더 기다리는 아이들이 둘 있다. 네 식구는 거실에 밥상을 펴고 떡볶이와 순대를 정신없이 먹는다. (떡볶이는 꼭 식탁이 아닌 밥상에서 먹게 되는 이유는 뭘까?) 아이들과 남편은 안 매운 떡볶이를, 나는 매운 떡볶이를 먹는다.   

    

연애 초창기 시절, 남편을 매운맛으로 유명한 떡볶이집에 데려간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열렬한 매운맛 마니아였다. 정말 맵고 맛있다고 생각했던 떡볶이집이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남편을 데려갔다. 남편은 떡볶이를 한 입 먹자마자 이마와 코에 연신 땀이 맺혔고, 떡볶이 접시가 다 비워질 때쯤엔 눈물, 콧물을 닦아낸 휴지가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였다. 오열하듯 떡볶이를 먹는 남편의 모습이 걱정돼서 괜찮냐는 말을 아주 여러 번 물었다. 남편은 그때마다 괜찮다며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며 연신 떡볶이를 입으로 넣었다. 그 순간을 빨리 끝내는 방법은 자기 입에 떡볶이를 빨리 쓸어 넣는 일밖에 없다는 듯이 말도 없이 떡볶이를 먹었다. 투혼을 불사르며 떡볶이를 먹는 남편이 듣고 싶은 말은 '괜찮아?'라는 걱정보다 '잘 먹는다'는 칭찬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남자에게 필요한 건 걱정보다 '너 잘한다'는 칭찬이라는 걸.




여전히 매운 음식을 못 먹고 책을 읽지 않는 남자와 매운 음식을 사랑하고 독서를 즐기는 여자가 함께 산다. 남자는 아직도 여자에게 칭찬받고 싶어 하고, 여자는 남자를 기꺼이 칭찬한다. 15년 된 부부가 여전히 뜨겁게 사랑하느냐, 사랑 하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남자는 아직도 칭찬받고 싶어 하고, 여자는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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