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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Apr 24. 2021

아이들이 학교에 가도, 설레지 말지어다

코로나 시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

    

나의 설렘이 화근이었을까?


올해 들어 처음으로 두 아이가 동시에 등교를 하는 날이었다. 작년에 둘이 같이 학교에 간 날이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이어서 올해는 제발 학교에 자주 갈 수 있기를 바랐다. 나의 바람이자 모두의 바람인 일상으로의 복귀는 올해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지방은 대부분 학교가 등교를 한다고 들었지만, 수도권은 과밀 학급이 많아 3분의 1 등교를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학교, 초등학교에 각각 한 명씩 아이를 보내고 있는 학부모로서 안타까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를 못 가면서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만들어갈 추억을 잃었고, 학습을 하면서 쌓아야 할 지식을 잃었다. 어쩌다 학교를 하루 갔다 오면 전쟁터에 나갔다 온 듯 지쳐 나가떨어지는 걸 보니 체력도 잃은 것 같다. 학교에서 보고, 들으며, 느끼며 키워야 하는 생각들도 잃었다. 온라인 수업을 주로 하고, 영상과의 접촉이 많아지니 시력도 잃게 되었다.      


두 아이는 학교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특히 첫째 아이는 달력에 학교 가는 주를 표시해 놓고 소풍 가는 날처럼 열렬히 기다렸다. 방 책상에서 벗어나 친구들이 있는 학교로 간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아이는 일찍 일어나 세안을 깨끗이 하고, 쌍꺼풀 테이프를 정성껏 붙이고, 얼굴 기름기를 제거해 줄 파우더도 곱게 펴 발랐다. 긴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교복을 입은 아이는 아가씨 티가 풀풀 난다.


설레어하는 아이만큼, 아니 그 보다 더, 내가 설레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등교일이 겹치는 이번 3일 동안 나는 무엇을 할지 머릿속에서 구름 위를 떠다녔다. 아이들의 점심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3일 동안 서울 나들이를 가려고 생각했다.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어디가 더 봄을 만끽하기에 좋은 장소일지 검색도 했다. 거리와 시간을 고려하고 갈 장소를 거의 확정해 둔 참이었다.      

아이 둘은 성향이 다르다. 첫째가 소풍 가는 날처럼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한다면, 둘째는 그 반대다. 코로나로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을 주말처럼 즐거워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이 학교에 간다는 사실을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나도 일찍 일어나 정말 아이들이 소풍이라도 가는 냥 김밥을 말았다. 갓 지은 밥에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간을 하고, 당근을 볶고 명란을 넣어 명란 김밥을 만들었다. 학교에 갈 아이들을 위해 정성을 들이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 김밥은 나의 설레는 기분에 정점을 찍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다.


늘 그렇듯 두 아이는 식탁에서도 어긋났는데, 첫째 아이는 맛있게 먹었지만, 둘째 아이는 맛이 없다며 칭얼댔다. 학교에 가기 싫은 둘째는 기분이 밥맛을 떨어뜨리는 듯했다. 아이의 징징거림이 나의 설레는 기분을 막을 순 없었다. 나는 김밥을 연달아 아이 입에 억지로 밀어 넣고, 머리를 빗겨서 학교로 보냈다.      


두 아이를 보내고 거실을 보니 텅 비었다. 텅 빈 집. 참 오랜만이었다.

텅 빈 집에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책도 읽고, 밥도 먹고, 사람들도 불러서 차도 마시고, 일도 했던 텅 빈 집의 상쾌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리웠던 만큼 달콤했다.      


나는 김밥을 싸느라 어질러진 식탁을 치우고 부지런히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빨리 끝내고 나갈 생각에 손을 부지런히 놀리고 있었는데,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둘째 아이가 들어왔다.

“너 왜 왔어?” 나는 놀란 토끼도 저리 갈 만큼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와서 지금 갑자기 등교 중지됐다고 집에 가래요.”


아이는 학교 입구까지 갔다가 돌아온 듯했다. 그제야 나는 스마트 폰의 알리미를 들여다봤다. 20분 전부터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말라는 학교 안내 문자와 알리미가 주르륵 나타났다. 확진자가 나왔다는 학교에 대한 걱정과 참으로 오랜만에 가질 나의 나들이가 좌절된 데에 대한 실망감이 겹쳐져 송곳 같은 분노가 내 마음을 찔렀다. 표정이 좋지 않은 엄마를 보고 눈치 빠른 둘째가 말했다.


“엄마, 오늘 점심 안 해서 좋아했는데, 속상하죠?”

핵심을 찌르는 우리 아들. 맞다. 나 오늘 한 끼 안 차려도 된다고 무지 좋아했었다. 속상할 마음을 달랠 틈도 없이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또 들린다. 딸아이도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들어온다.

“힝, 뭐야 진짜.”

아이는 전후 사정을 들어서 이미 상황을 알고 있는 듯했다. 동생 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내쫓겨서 집으로 터덜터덜 왔을 아이가 딱해 보였다. 그렇게나 학교에 가고 싶어 했는데, 등교가 허무하게 무산되어서 크게 실망한 듯했다.      


이건 다 내가 너무 설레어한 탓이다. 지나치게 설레어 오두방정을 떨다가 동티가 들어 내 발목을 잡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친구들과 여행 갈 계획을 잡아두고 좋아서 헤벌쭉해 있으면 아이는 전날부터 슬며시 열이 나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학교에서 좋은 상을 받아와서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싶어 입이 달싹거릴라 치면, 또 한 아이는 문제를 만들어 나를 고민에 빠뜨렸다. 얼마 남지 않은 만기 적금에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으면 부푼 마음을 찌를 바늘이 곧 나타나 나의 적금을 공중분해시켜 버리곤 했다. 언제나 그래 왔는데, 오늘도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두 아이의 등교에 설레는 티를 내면서 김밥까지 싸는 모습에 하늘이 노했던 것이 틀림없다.     

나는 그저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아이들의 자리로 돌아가고, 나도 나를 찾을 수 있는 날이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좀 설레었을 뿐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날이 더 이상 설레지 않게 되는, 그런 날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설레어하지 말고, 기쁜 티 내지 않으면서 조심해서 기다릴 거다. 나의 설렘에 더 이상 마가 끼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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