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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Apr 21. 2021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꿈일지도

'육아'라는 꿈


 

“엄마, 나 어제 무서운 꿈을 꿨어.”

잠에서 깨자마자 나에게 오는 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무슨 걱정이 딸을 악몽에 시달리게 만드나 싶어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딸에게 물었다.

“무슨 꿈을 꿨는데?”

“우리 가족이 집에 있는데, 우리 앞 동에서 불이 났어. 불이 정말 크게 나서 불길이 우리 집을 향해 오고 있는데 나 빼고 우리 가족은 너무 태연하더라고. 나만 혼자 어쩔 줄 몰라서 허둥지둥하고.”

딸은 아찔했던 어젯밤 상황이 여전히 실제 상황으로 느껴지는 듯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불 꿈은 흔히 말하길 길몽이다. 길몽을 꾼 딸아이를 우선 치하했다.

“그 꿈 좋은 꿈이네. 엄마가 살게.”

나는 호기롭게 지갑에서 천 원을 꺼내 딸에게 주었다. 딸은 잠에서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자기 앞에 놓인 천 원에 황당해했다.

“꿈도 돈 주면 살 수 있는 거야? 좋은 꿈 맞아?”





딸은 자신이 꾼 꿈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못 미더워했고, 좋은 꿈이 맞는지도 의심했다. 좋은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난밤 느꼈던 불안이 너무 선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나도 좋은 꿈이 맞는지, 꿈을 돈 주고 산다고 그 꿈이 내 꿈이 되는지에는 확신이 없다. 다만, 돈 천 원으로 딸의 불안을 씻어 주고 싶었다.     

말은 길몽이니, 어쩌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지만, 꿈 이야기를 듣자마자 불길 속에서 혼자만 불안에 떨고 있는 딸의 모습이 왠지 지금 딸이 느끼는 심정 같아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불안하고 두려운데 태연한 가족은 딸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상황이 지금 내 모습 같았다. 힘든데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이 혼자 불길을 앞에 두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은 딸에게 현실일지도 모른다.      


딸은 피아노 전공으로 예고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뭐든지 잘하고 싶어 하는 딸은 공부에도 욕심이 많다. 코로나로 학교를 못 가는 상황에서도 학원을 보내달라고 조르고, 인터넷 강의를 구매해 달라고 한다. 매일 피아노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늘 자신의 부족함을 찾는다.      

‘나는 악보를 왜 이리 빨리 못 읽는지 모르겠어.’  ‘손가락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표현력이 너무 부족한 것 같아.’ 타고난 재능은 부족할지 몰라도 피아노를 사랑하는 마음은 차고 넘친다. ‘이 곡은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 ‘베토벤은 귀가 안 들리는데 어떻게 이런 곡을 썼을까.’‘저 피아니스트를 한 번만 이도 만날 수 있다면.’ ‘왜 사람들이 클래식을 많이 안 듣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좋은데.’라며 클래식 피아노에 대한 찬양을 매일 한다.      


클래식에 무지한 엄마는 딸이 지금 배우고 있는 곡의 이름조차도 외우지 못했다. 딸이 매일 이 곡은 뭐라고 설명을 해 주지만, 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매번 딴소리한다.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 기특해서 딸에게 특별한 욕심을 내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고 싶어서 본인이 안달 나 있는데, 나까지 뭐라고 할 이유는 없었다. 늘 알아서 하겠거니 믿어주며, 요구하는 지원만 성실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딸이 혼자 앞으로 나가기가 벅찼나 보다. 불길을 앞에 두고 무서워 혼비백산한 가운데 온 가족이 태연했다니. 꿈이지만 꿈이 아닌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을 천 원으로 때우며 분위기를 반전시켜 보려고 했지만, 딸의 불안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엄마, 좋은 꿈 맞겠지?” 다시 확인하며 재차 묻는 딸에게 “그럼, 좋은 꿈 맞아. 엄마는 오늘 로또 사야겠다.” 하며 호기롭게 대답했다.     


옆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아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사실은 나도 어제 꿈을 꿨어요. 우리 집에 돼지 열 마리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제가 그 돼지 위에 올라탔어요. 돼지 위에 올라타 있는데 갑자기 용이 창문으로 들어와 입에서 불을 뿜는 거예요. 불길 속에서 돼지들이 이리저리 날뛰는데, 거기가 똥 밭인 거예요. 똥이 저한테 다 묻고 난리가 났어요. 내 꿈은 얼마짜리예요?”

아들이 천연덕스럽게 길몽 종합세트를 풀어놓았다. 어디서 길몽의 종류를 들어서 알고 있었는지, 길몽의 요소를 적재적소에 넣어 이야기를 순식간에 만들었다.      




뭐든지 알아서 잘할 것 같은 딸은 뭐가 길몽인지 흉몽 인지도 모른다. 딸은 돈에 관심 없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좋아하는 음악 들을 때 제일 행복하다. 억울한 일에는 얼굴부터 벌겋게 달아오르고 다짜고짜 눈물부터 흘리며 분해한다. 감정적이고 이상적이다.


아직 작고, 여전히 미숙해 보이는 아들은 알고 보면 꾀돌이다. 공부에는 전혀 욕심이 없지만, 돈 욕심은 많다. 엄마도 안 쓰는 가계부를 쓴다. 꿈이 돈이 되는 광경을 보자마자 바로 꿈을 지어내어 돈 받을 궁리를 한다. 안되면 말고 하며 일단 이야기부터 하고 보는 뻔뻔함을 갖추고 있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둘은 정말 다르다. 우리 아이들은 성별도, 외모도, 성격도,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입맛도, 취향도, 골격조차도 하나도 닮지를 않았다. 완전히 다른 아이 둘을 키우면서 나는 냉탕과 온탕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간다. 슬퍼지려 할 때 웃기고, 마음 놓고 웃고 있을 때 뒤통수 한 방을 먹이는 우리 아이들 덕분에 어느 한순간도 마음 놓고 웃지 못하고 울지 못한다.  

    

덕분에 연기력이 는다.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 좋지만 좋지 않은 척,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척하며 앞으로 맞게 될 반전에 대비한다. 꿈 때문에 놀란 딸에게는 좋은 척을 했지만, 꿈 이야기를 지어내며 한탕을 노리는 아들에게는 냉정한 연기를 펼친다.

 “네가 꾼 꿈은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면 훌륭한 인물이 되겠다는 꿈이네. 오늘은 수학 문제집 한 장 더 풀어.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거 보니 잘 풀어질 거야.”      


두 아이와 보내는 지금 이 시간이 꿈결 같다. 오래 꾸고 싶은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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