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함을 이기는 유일한 동력은 '재미'였습니다

by 달글이

브런치 작가 합격 메일이 준 기쁨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합격의 감격이 서서히 가라앉자, 그 자리에는 묵직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서, 이제 뭘 써야 하지?’ 세상으로부터 ‘써도 좋다’는 허락은 받은 것 같은데, 그때 첫 연애를 하기 시작한 시점이었으니 내 연애에 대한 자아성찰 이야기를 적어보았다. 남들이 궁금해하고 읽고 싶은 이야기를 써야하는데, 쓰고 싶은 이야기를 먼저 써보는 선택을 했다.


글쓰기 근육을 키우겠다며 매일 아침 쓰던 짧은 글들은 그저 나를 위한 재활 훈련일 뿐이었다. 그렇게 내 첫 번째 브런치스토리북을 완성하고는 다시 멈췄다. 다음 이야기를 뭘 써야할지 눈 앞이 깜깜해졌다. 1년 전, 처참하게 실패했던 블로그의 기억이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또다시 방향 없이 헤매다 지쳐 쓰러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 또 실패하면, 정말로 다시는 글을 쳐다보지도 못할 것 같았다.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신중함은 이내 두려움이 되어 나의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만 하며 허송세월하던 어느 주말 오후였다. 침대에 엎드려 무심코 밀리의 서재라는 구독 앱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베스트셀러 목록을 훑다가, 신간 코너를 기웃거리다가, 문득 추천 목록 한구석에 있는 소박한 제목의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대단한 비법을 알려줄 것 같지도, 엄청난 성공담을 담고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그저 그런 책이었다.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한번 읽어볼까.’ 별 기대 없이 책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책의 한 문장 앞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완벽한 서평을 쓰려고 애쓰지 마세요.
당신이 그 책에서 밑줄 그은 단 하나의 문장,
그 문장에 대한 당신의 짧은 단상이야말로
가장 독창적이고 강력한 콘텐츠입니다.”


쿵, 하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글’을 쓰려고 했다. 전문가처럼 분석하고, 작가처럼 유려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이 문장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글을 쓰려 하지 말고, 그저 당신의 ‘흔적’을 보여주기만 하라고. 밑줄 그은 문장, 귀퉁이를 접은 페이지, 책을 읽다 떠오른 엉뚱한 생각. 그 모든 것이 나만의 고유한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순간, 닫혀 있던 생각의 댐이 터져버린 것처럼 모든 것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그래, 이거다! 나는 서평을 쓰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책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즐거움과 설렘, 그 순간의 감정들을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어려운 책을 끙끙대며 읽고 요약 정리하는 게 아니라, 어떤 책이든 나만의 방식으로 즐겁게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거였다.


‘쉬운책방’이라는 이름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름의 의미도 그 순간 완벽하게 재정의되었다. ‘쉬운 책’만 골라 읽는 책방이 아니라, ‘어떤 책이든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드는 책방’. 어려운 고전 소설이라도 마음에 드는 문장 하나를 필사해보는 행동, 두꺼운 철학책이라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 질문 하나를 던져보는 그 과정. 그 사소한 행동 하나가 책의 높은 문턱을 가뿐하게 넘어설 수 있는 계단이 되어줄 것이었다. 나의 블로그는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실이 아니라, 그런 즐거운 행동들을 함께 실험하고 공유하는 놀이터가 되어야 했다.


나도 모르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블로그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1년 전의 실패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그때는 ‘의무감’이라는 무거운 쇠사슬을 발에 매달고 있었지만, 지금 내게는 ‘재미’라는 아주 가볍고 강력한 날개가 달려 있었다.


새 블로그의 대문을 만들고, 프로필 사진을 걸었다. 아무런 규칙도 정하지 않았다. ‘1일 1포스팅’ 같은 어리석은 약속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원칙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내가 즐거운가?’ 내가 쓰는 과정이 즐겁고, 내가 소개하는 책이 진심으로 좋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성실함을 이기는 유일한 동력은 재미라는 것을, 나는 첫 번째 실패를 통해 뼈저리게 배웠다. 재미는 억지로 쥐어짜지 않아도 스스로 타오르는 연료와 같다. 그 연료를 가득 채운 나는, 이제 막 출발선에 다시 선 참이었다. 이번 레이스는 얼마나 길고 험난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적어도 길 위에서 길을 잃고 울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나는 이제 나의 지도를 가졌고, 내 심장이 뛰는 방향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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