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글 같은 건 쓰지 않겠다고, 내 인생에 작가라는 두 글자는 없다고 선언했지만, 인간의 다짐이란 얼마나 연약한가. 버리겠다고 결심한 것들은 오히려 더 끈질기게 삶의 구석구석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마음에 꼭 드는 문장을 만났을 때, 어디엔가 이 감동을 기록해두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억울한 일을 당한 날이면, 이 부당함을 논리정연하게 글로 써서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주말 오후, 햇살 좋은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그건 미련이었다. 아주 지독하고 질긴, 글쓰기에 대한 미련.
돌이켜보면 스무 살 무렵부터 나는 막연히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전공 서적보다 소설책을 더 열심히 읽었고, 리포트를 쓸 때면 내용보다 문장의 아름다움에 더 집착했다. 언젠가는 내 이름이 박힌 책 한 권을 갖게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 꿈은 현실의 벽 앞에서 번번이 좌절됐다. 먹고 사는 일이 바빴고, 재능이 없다는 자괴감이 더 컸다. 그렇게 꿈은 가슴속 가장 깊은 서랍 안에 넣어두고 자물쇠를 채웠다. 첫 번째 블로그는 그 서랍을 어설프게 열어보려다 상처만 입고 황급히 닫아버린, 미숙한 시도였을 뿐이다.
그렇게 또 몇 계절이 흘렀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건 어느 평범한 저녁이었다. 회사에서 맡았던 큰 일을 실패하고 좌절하고 있을 때, 내가 쓴 일기장을 본 것이다. 내가 이런 글을 적었다고 놀랬을 정도로 희망과 기대가 가득한 글이다. 단편 소설, 에세이, 그냥 막적은 글들은 과거의 내가 보내는 편지였다. 나에게 국한된 글이지만, 잘 다듬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그리고 받아들였다. 나는 글을 써야한다.
그날 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서랍의 자물쇠를 풀었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글쓰기는 내가 하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숨 쉬고 밥 먹는 것처럼, 그냥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 같은 것이었다. ‘잘 써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쓰지 않으면 내가 나로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이 전부였다.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보였다. 지난 일 년간 완전히 녹슬어 버린 글쓰기 엔진에 기름칠을 하고, 힘없이 물렁해진 팔다리에 근육을 붙이는 일. 나는 인터넷을 뒤져 온라인 글쓰기 클래스를 하나 등록했다. 매 주 정해진 주제에 대해 짧은 글을 써서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첫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새벽 여섯 시, 알람 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책상에 앉았다. ‘당신의 아침 루틴’이라는 주제 앞에서 머리가 하얘졌다. 겨우 쥐어짜 낸 문장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조악했다. ‘돈주고 자학하는거 같아’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달랐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었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한, 일종의 재활 훈련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을 그대로 따라 쓰는 필사부터 시작했다. 좋은 문장의 구조를 몸으로 익히는 과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문장을 만드는 감각이 돌아왔다. 그다음엔 짧은 서평에 도전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 삶과 연결 지어 한두 문단의 감상을 덧붙이는 연습이었다. 그렇게 매일 꾸역꾸역 쓰다 보니, 어느새 글쓰기는 고통이 아니라 아침을 여는 즐거운 의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글들은 소장용으로 책을 만들어 내 책장에 기념비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두 달쯤 지났을까. 문득 재활은 이쯤 하고, 내 글을 조금 더 넓은 세상에 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했던 블로그의 기억이 발목을 잡았지만, 이제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브런치스토리’였다. 작가 심사를 통과해야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광고 없이 오직 글의 힘으로만 독자와 만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이 될 리가 없어.’
마음 한편에서는 비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속삭였다. ‘한번 해보기나 해. 떨어져도 아무도 몰라.’ 나는 며칠 밤을 새워 지원서와 샘플 글을 다듬었다. 내가 왜 글을 쓰고 싶은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에 대해 솔직하게 눌러 담았다. 그리고 결과는 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신청하기’ 버튼을 눌렀다.
결과는 일주일 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브런치 작가가 승인되었습니다.] 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본 순간, 심장이 쿵쾅거렸다.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다시 읽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세상이 나를 ‘작가’라고 처음으로 불러준 순간이었다. 대단한 등단도 아니고, 이제 겨우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을 얻었을 뿐인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그 합격 메일은 내게 작은 증명서와 같았다. 1년 전, 처참하게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찍었던 ‘재능 없음’이라는 낙인을 지워주는 증표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모래 위에 성을 쌓던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작고 볼품없을지라도, 단단한 땅에 주춧돌 하나를 놓은 기분이었다. 진짜 시작은, 바로 거기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