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 대한 향수병은 일상생활의 서러움에서 싹튼다는 것을
남의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20대에 이미 몇 번의 경험해 봤기에 솔직히 조금 만만하게 생각했다. 운 좋게도 나는 김치 없이도 잘 살고, 정갈하게 잘 차려 먹는 한 끼보다는 샌드위치나 파스타 같은 간단식을 선호하는 편이라 과거 해외에서 거주할 때에도 딱히 불편함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더더욱이 이번엔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온 것이니 몸 편한 백수가 향수병이 생길 일이 뭐 있겠나 싶었다.
향수병이란 보고 싶은 가족이나 그리운 한국음식이 아닌, 이방인으로서의 서러움을 느낄 때에도 생길 수 있는 일이란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미국으로 온 지 두어 달 정도 지났을 때, 남편과 LA근교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휴양으로 유명한 도시였기에 우리는 가득 신난 마음으로 연신 서로의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어느 건물 2층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가는 길, 해당 건물 1층에 있는 어떤 소품샵 직원이 가게에서 나와 우리를 향해 소리 질렀다.
"이 근방에서 사진 찍지 마!!!!!"
나는 길거리 배경으로 남편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고 내 핸드폰이 향한 방향은 그 가게를 등진, 가게와는 정 반대 방향이었기 때문에 무슨 상황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똑 부러지게 사이다로 대응하기란 쉽지 않은 일. 억울한 마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그 여자의 한마디에 기분이 잡쳐 식사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걸로 즐거운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식당에 들어가 술 몇 잔 마시고 기분을 풀고 싶었다.
좋은 날씨를 만끽하며 시원한 맥주 벌컥벌컥 마시고 나면 기분이 금방 다시 좋아질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서버는 텅텅 빈 널찍한 자리를 뒤로하고 발코니 한구석 여분의 의자를 쌓아둔 곳 바로 옆자리의 작은 간이좌석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자리를 줘도 어떻게 이런 자리를...' 싶었다. 주문을 하며 다른 자리 많은데 저기로 옮길 수는 없겠느냐고 물어봤지만, 이미 다 예약이 있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공휴일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자리들은 우리가 맥주와 칵테일을 여러 잔 마시는 내내 계속 빈자리였다. 벌써 세 잔 째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두 시간 가까이 텅 빈 우리 주변의 자리들을 보며 도무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좀체 취하지도 않았다.
이곳에 오는 길에 마주쳤던 이상한 아줌마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의자 쌓인 구석자리에 앉아있는 우리의 모습까지 모든 것이 다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한번 잔뜩 구겨진 기분은 도무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내가 백인이 아니라서 이런 대우를 받는 건가?', '내가 미국인이 아니라서? 영어를 미국인처럼 구사하지 못해서? 내가 아시안 여자라서?' 하는 근거 없는 부정적인 마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헤집었다.
불편한 심기 가득 찬 내 얼굴을 보고, 이제는 남편이 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남편을 보니 이대로 남편의 기분까지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무례한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그 어떤 사람에게라도 똑같이 무례하게 굴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미국인이 아니어서, 우리가 백인이 아니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넘겨짚는 일이다. 기분 좋을 경험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어디서든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오늘은 운이 좀 나빴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별 것 아닌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를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시아인이 비 주류인 나라이기에, 영어가 내 모국어가 아니기에, 괜히 눈치 보이고 예민해지는 것이 속상하고 서러웠다. 밤마다 남편과 함께 보던 미드 속 영어도 듣기 싫었다. 영어 말고 내 모국어, 한국어 대화가 그리웠다. 별다른 긴장감과 조심성 없이도 편히 지낼 수 있는 나의 고국이 그리웠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나 음식에서만 향수병이 생긴다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향수병은, 서러움에서 싹틀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간의 해외생활에서 이것을 느껴보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원하면 언제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기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인 남편과 미국에서 결혼했으니, 내가 원한다고 한국으로 훌쩍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마음 한편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마음으로 인해 작은 일에서도 큰 폭풍이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어쩐지 나는 더 이상 서럽지 않았다. 나는 이방인이 맞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이곳에서 살아가기로 나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이곳에 적응하여 살아가기까지 이런 상황은 수 없이 계속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방인이 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게 뭐?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았다는 것, 영어 외에도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라고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수없이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는 또다시 마음에 생채기를 입고 며칠간 마음 앓이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이 모든 것이 적응의 한 과정이며, 타국에서 살아가며 누구나 겪을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앞으로 또다시 폭풍이 이는 날에는 나 홀로 눈물 훔치는 대신, 한인타운에 가서 맵디 매운 짬뽕과 떡갈비를 잔뜩 사다 먹고는 다음날 '미국 정말 짜증 나네!' 하며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
나를 멈추지 못하는 고난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 이런 고민과 방황하는 시간이 쌓여, 보다 더 튼튼하고 건강한 내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