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지박령이 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원래도 나는 역마살이 꼈다는 소리를 질리게 들을 만큼 좀체 한 곳에 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스물한 살에 미국 교환학생, 스물두 살에 러시아 교환학생, 스물다섯 살에 러시아 취업, 스물일곱 살에 호주에서 가이드 생활까지.. 나의 20대는 끝없는 메뚜기 생활이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어찌나 뛰어다녔는지 정신 차리고 보니 서른을 목전에 앞두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친구들은 모두 멀끔한 회사에 취직해 한자리 씩 꿰차고 있었다. 아차 싶은 마음에 그제야 나도 계획이란 걸 세우기 시작했다.
'나도 서른 전에는 한국에서 자리 잡아야지'.
그렇게 한국에 돌아와 고군분투하며 지내기를 6년, 결과가 어마무시하게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반골기질 다분한 나에게 이 정도면 꽤 고분고분하게 한국에서 적응해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눈떠보니 나는 지금 머나먼 미국 땅에서 무려, 백수로 살고 있다.
계획대로 되는 인생 없다더니, 그 말이 나에게 적중할 줄은 몰랐지!
무려 14년 전, 미국 교환학생 시절 같은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가 있다. 미국에서 잠깐 만난 나를 만나기 위해, 내가 러시아에 있을 때는 유럽으로, 호주에 있을 때는 호주로, 한국에 있을 때는 한국으로 기꺼이 와주던 친구였다. 남녀사이 친구가 어디 있냐 하지만, 우리는 정말 손도 스친 적 없는, 말 그대로 정말 친구였다.
코로나 전까지는.
코로나로 인해 3년을 넘도록 보지 못하다가 그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싱가포르 어느 골목. 아직도 코로나에 예민한 시기, 마스크를 두 겹을 쓰고 보낸 4일의 짧은 휴가였다. 그런데 그 불편하고 이상한 상황이 나에게는 어째서인지 너무나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한 번도 이성으로 바라본 적 없는 친구의 손이 왜 잡고 싶어 졌는지는 아직도 너무나 불가사의한 일(코로나가 이렇게나 사람에게 위험한 것이었다니!). 여차저차 그 여행 이후 우리는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고, 인연은 인연이었는지 결혼까지 골인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34살이 되어서 밑도 끝도 없이 갑작스레 미국 LA로 이민을 오게 된 이유다. 내 친구는 말했다. "너무 부러워!!!". 친구의 그 말에 내가 반쪽짜리 웃음을 지었던 이유는 얼큰한 한국 음식이 그리워서도, 1년에 한 번이나 볼 수 있을까 싶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도 아니었다. 영주권이 나올 때까지, 미국 밖으로 나갈 수도! 운전을 할 수도! 취직을 할 수도 없는! 마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지박령 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영주권이 나오기까지는 1년도, 2년도 혹은.. 그 이상도 걸릴 수 있는 일이다. 언젠가 나오겠지 하고 손 놓고 앉아있다간 진짜 지박령이 될지도 모를 일. 차 없이는 생활하기 힘든 LA에서 면허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몹시 한정적이다. 게다가 백수인 나는 남편의 수입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상황. 취미생활이라도 하겠다며 이것저것 손대거나 쇼핑에 몰두하게 된다면 우리 둘의 경제는 파탄 나고 말 것이다.
'뭘 하고 지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시간을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지박령이 되지 않기 위해 머리를 쥐어 짜내어 돈이 들지 않으면서, 집에서 할 수 있으면서, 언젠가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간추리기 시작했다.
- 운동하기 (아파트 내 헬스장)
- 브런치에 글쓰기
- 유튜브에 일상 올리기
- 블로그에 꾸준히 일기 쓰기
- 독서하고 독후감 작성하기
- 영어 공부하기
- 한국어 튜터 준비하기 (혹시 모를 취업난을 대비하여....)
그렇게 LA에 떨어진 지 벌써 6개월.
현재까지 나의 성과라고는 귀하고 소중한 구독자 50여 명(절반이 가족과 친구 일)의 유튜버..가 되었다는 것과, 브런치'작가'라는 타이틀이 부끄러울 만큼 남루한 글 몇 개를 올렸다는 다소 민망한 결과가 전부이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박령이 되어 소멸해 버릴 수는 없기에, 오늘도 나는 LA 어딘가의 집 한켠에서 나의 가치를 잊지 않기 위한 발버둥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나는 오늘도 나를 기록한다.
"나 아직 살아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