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가족여행을 원한다면, 휴양지로
작년 2월 나의 결혼식이 끝난 후, 미국인인 남편은 미국으로 먼저 돌아갔다. 그리고 나의 미국 입국까지는 몇 달이 남은 상황.
나를 멀리 이민 보낼 생각에 부모님은 마음이 여간 좋지 않으셨나 보다. 가족들과 멀어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헛헛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족은 함께하는 여행을 비교적 자주 하는 편이기는 했지만,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 대부분을 국내 여행으로 다녔다.
생각해 보니 온 가족이 모두 함께했던 마지막 해외여행이 벌써 8년 전, 그것이 못내 아쉬웠던 나와 엄마는 오랜만의 온 가족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혼자서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스트레스가 심했던 나, 그리고 먼 타지로 딸을 이민 보낼 생각에 서운한 부모님, 야근에 지친 동생과 함께 어딜 가면 좋을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휴양지다!'
한번 여행 가면 하루에 삼만보는 기본으로 걸어 다니는 나이지만, 이번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예쁜 풍경을 보며 편히 쉬고 싶었다. 이제는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부모님에게도 휴양지가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에서 너무 멀지 않으면서도 부모님을 모시고 가기에 나쁘지 않은 휴양지가 어디일까 많은 고민 끝에, 말레이시아 코나키나발루로 정했다.
휴식을 위한 여행보다는 관광을 위한 여행을 즐겨왔던 나는, 이번 가족여행 스케줄을 짜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다. 코타키나발루 여행 후기를 찾으면서, 무조건 엄마와 함께, 혹은 부모님과 함께 한 코타키나발루 여행기만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보니 만족스러웠다는 여행기에 공통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고급 리조트형 숙소를 선택했다는 점이었다. 나 혼자 가는 여행이었다면 분명 도심 한가운데 깔끔한 비즈니스 호텔을 잡았을 것이 분명했다. 이래 봬도 여행업에 종사했던 사람으로서, 나의 능력치를 모두 활용하여 내 기준 최선의 리조트를 예약했다. 푸른 바다가 보이는 리조트의 멋진 뷰를 보고 있자니 나도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5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코타키나발루 공항. 동남아 만의 이 습한 공기가 도대체 얼마만인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피곤하다고 인상 쓰기 시작한 엄마의 표정을 애써 무시하고 급하게 택시를 잡아 리조트로 향했다.
'리조트만 도착하면, 표정이 달라질 거야. 다들 아마 정말 만족할걸? 후후후...'
5시간의 비행과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에 모두 피곤함에 절어 있었지만, 나 혼자 변태처럼 리조트를 보고 조만간 바뀔 가족들의 표정을 속으로 상상하며 설레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우리의 리조트. 층고 높은 리조트 로비와 큼지막한 풀장, 끝도 없이 늘어 선 야자수 나무, 반짝이는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그 바다만큼이나 은은한 조명이 가득하던 리조트에 들어 선 순간 가족들의 표정이 만족스럽게 바뀌기 시작했다. 여간해서 신나 하지 않는 동생의 들뜬 목소리와 로비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부모님의 표정에서 열심히 찾아보고 예약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가족 모두의 첫 휴양지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설렌 마음으로 지나갔다.
눈을 뜨니 커튼 밖 작은 발코니 앞에 천국이 펼쳐져 있었다. 드높은 야자수 나무, 그 아래 청량한 수영장,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까지. 마치 제일 좋아하는 간식을 기다리는 어린이가 된 것 같은 마음으로 신나서 폴짝거리며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이곳은 낮도 밤도 참 예쁘구나!
우리의 첫 일정은 보트를 타고 근처의 섬에 들러 스노클링을 하는 것이었다. 리조트에 연결된 선착장으로 가서 오리발과 구명조끼 스노클링 장비를 대여하고 보트에 올랐다. 나는 사소한 것에도 감탄사를 내뱉는 호들갑스러운 성격이라면, 엄마와 동생은 어지간해서는 신나 하는 모습을 잘 볼 수 없는 나와는 반대의 성격이다. 그런 엄마와 동생도 보트에 오르니 한껏 들뜬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아빠와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동행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흐뭇함은, 혼자 하는 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혼자 하는 여행을 즐겨했던 나로서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이었다.
가족들이 손톱만 하게 보일만큼 바다 멀리 들어가 스노클링을 하는 동안 물을 무서워하는 나는 해변가에 앉아 가족들의 짐을 지켰다. 자식들이 잘 먹고 잘 노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다는 게 이런 비슷한 감정일까 하는 웃긴 생각이 들었다. 혼자 짐 지키고 앉아 있었던 내가 못내 아쉬웠던지, 아빠가 한 번만 들어가 보라며 스노클링 장비를 내밀었다. 얕은 곳만 한번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간 맑은 바닷물 속은, 그야말로 신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크고 작은 암초 사이로 이름을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물고기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번 보기나 하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던 바닷속에서 티브이에서나 볼 법한 물고기가 자유롭게 헤엄치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한참을 물속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이 재미에 스노클링 하는 거구나! 물에 대한 공포심이 순간 사라질 만큼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바닷물에서 계속 놀던 가족들도, 해변가에 앉아있던 나도 어깨와 팔이 새빨갛게 익어 따가워질 즈음 우리는 다시 리조트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리조트에 돌아오자 온몸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강한 햇볕에 화상을 입은 듯했다. 동생과 나는 화끈 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리조트의 풀장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물속에서 시간을 더 보낸 것이 화상을 더 악화시키기만 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엔 왠지 리조트의 차가운 수영장 물이 화상 입은 내 팔을 식혀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서라도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싶은 핑곗거리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실질적인 도움은 하나도 되지 않았겠지만, 에메랄드 빛의 풀장에 들어가니 따갑던 팔과 어깨가 좀 낫는 기분이 들었다. 물을 두려워하는 나도, 바다와는 달리 내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는 수영장 물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둥둥 떠다니며 여유를 만끽했다. 파란 하늘 아래 넓게 퍼진 야자수 나무를 보며 생각했다.
'이것이 진정한 휴가구나. 휴양지를 진정으로 잘 즐길 수 있는 나이와 체력이 되었구나. 20대에 그렇게 뽈뽈거리고 열심히 관광하기를 잘했구먼'
뭐니 뭐니 해도 여행의 묘미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식'.
물놀이 후에 밀려오는 허기짐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내 이럴 줄 알고, 식당도 몇 개 미리 찾아 두었지! 한인들에게 가장 평가가 좋다는 해물 전문점으로 택시를 타고 향했다.
친구와 함께 혹은 나 혼자 하는 여행이었다면 무조건 예쁘고 분위기 좋은 곳으로 찾아갔겠지만, 부모님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분위기보다 좋은 것은 음식의 맛.
내가 찾은 곳은, 부모님과 어르신들에게 평가가 가장 좋았다는 크랩전문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음식이 맛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내부도 단체 관광객이 휩쓸고 간 듯한 오묘한 분위기의 식당이었지만 후기를 굳게 믿고 음식을 기다렸다. 볶음밥과 모닝글로리는 기본, 가장 유명하다는 커리크랩과 코코넛버터 쉬림프를 시켰다. 그램수로 판매를 하는 덕에 얼마나 시키면 좋을지 감이 잘 오지 않았지만 종업원이 추천해 주는 대로 주문을 했다.
기다린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아 엄청난 양의 음식이 담긴 접시가 눈앞에 놓였다. 이거 우리 다 먹을 수 있을까 싶게 가득 쌓인 새우와 게를 보며 다들 조심스레 맛을 보기 시작했다. 한입 먹자마자 약간의 의심을 품었던 나를 호되게 비난했다. 한국인에게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집이구나! 단짠단짠의 조화가 기가막히게 어우러지는 맛이었다.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음식 맛평가에 꽤 까다로운 편인데 모두가 만족스럽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맛있게 식사하는 부모님을 보며 또다시 나는 부처와 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물론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다음 날에는 느지막이 시내에 나가 각종 야시장과 플리마켓, 대형마트를 돌며 이런저런 기념품과 특산품을 구경하고 구매했다. 일몰이 장관이라는 해변가 레스토랑에 가서 분위기 좋은 재즈 음악을 들으며 맥주도 몇 잔 마시고 돌아왔다. 우리가 주문한 메뉴가 누락되어 투닥거린 순간도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가족여행에 있어 갈등의 축에도 낄 수 없는 사소한 해프닝이었다.
이번 여행의 전 일정은, 휴양을 목적으로 한 여행으로서 특별한 일정을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보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딱 마지막 날에만 체크아웃 후 비행기 시간까지의 사이에 그룹투어를 예약해 둔 것이 있었다. 코나키나발루에 가면 꼭 가야 한다는 반딧불 투어가 그것이었는데, 벌레라면 질색팔색을 하는 나이기에 기대감보단 걱정이 더 큰 일정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환상적인 일몰과 반짝이는 반딧불이 무리의 광경은 정말 돈이 아깝지 않은 경험이었다. 오히려 덕분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투어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모님과 나와 동생 모두 만족감이 높았던 마지막 날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가족여행을 할 때에는 내가 속으로 바라는 것이 딱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건사고 없이 무탈하게 여행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며, 두 번째는 가족 간의 큰 다툼이나 갈등 없이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여태까지 그러한 일 없이 여행을 잘 마무리해 왔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이면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늘 긴장을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는 그런 나 조차도 너무나 편안하고 즐겁게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사는 것이 바쁘다는 이유로 내 나이가 적지 않은 만큼, 부모님의 연세도 점점 늘어간다는 것을 종종 잊곤 한다. 가족여행에서 가장 좋은 점은, 늘 가까이 있지만 얼굴 마주 보며 대화할 시간은 적은 부모님의 얼굴을 찬찬히 볼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다. 앞으로 몇 번의 가족여행이 더 남아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앞으로의 그 시간에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휴양지와 같은 여유와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