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먹여행자의 해외생활1_애증의 러시아,어느 도시에서

러시아어 전공자의, 미지근한 러시아 생활기 [교환학생에서 해외근로자까지]

by 방랑 소피아

"즈뜨라스뜨부이쩨!"

지금은 여행이나 겨우 할 수 있을까 싶은 수준의 문장밖에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실 나는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다.


알차게 생활했던 대학생 시절,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러시아 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톡보다 조금 위에 위치한, 시베리아쪽에 가까운 도시)에서 연수를 했던 경험이 있고,

대학교 졸업을 목전에 앞두고 오브닌스크(모스크바에서 차로 1시간반 거리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 있는 국내 기업에 취직하여 근로자로서 러시아에 거주했던 경험이 있다.


해당 나라에 거주하며 여행을 할 때에는, 일반 여행자로서 바라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 특이점이라면 특이점 일 것이다. 특히나, 현재 국제 정세 상 이제 러시아는 쉬이 여행을 하거나 거주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게 된 상황이기 때문에 나에게 러시아는 더욱이 각별한 의미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대학교 3학년 시절의 나는, 얼마 전 미국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때 였다. 처음 접했던 해외살이가 미국 LA였으니, 나의 외국살이에 대한 로망은 커질대로 커진 상태였다. 그렇게 모든 나라, 모든 도시가 예쁘고 찬란할 것이라는 큰 착각을 가진 채 다시 해외에 나갈 기회만을 모색하던 중, 교내에서 러시아 교환학생을 모집하는 것을 보게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혈기왕성하던 20대의 나는 충동적 성향이 강한사람, 실행력이 빠른사람이었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어디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러시아 오브닌스크의 교환학생 자리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내 인생 처음으로 발디딘 러시아의 도시는, 하바롭스크. 그 도시의 첫 인상은 '온통 회색빛이다'라는 느낌이었다. 도착한 첫 날의 날씨가 그러했고, 길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러했다.

90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크고작은 오래된 봉고차를 수입하여 버스로 사용하고 있는 곳. 한글 스티커가 고스란히 붙어있는 그 봉고차를 타고 내리는 어두운 색의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은 러시아 사람들. 튼튼하게는 보이지만, 이것이 학교 기숙사인지 교도소인지 분간이 어려웠던 교내 기숙사와 학교 건물. 매체로 접하던 러시아의 모습과는 다소 동떨어진 모습에 그 날의 내가 느꼈던 감정은 한 단어로 묘사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차마 좋았다고는 할 수 없었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어찌저찌 마음맞는 친구들을 만나 그 삶에 녹아들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러시아에서는 사람들이 친해지면 '굴럇찌'라는 것을 가는데, 이것은 산책을 의미하기도 하고 함께 어딘가를 놀러가자는 의미가 되기도 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 때로는 러시아의 친구들과, 때로는 중국인 친구들과 하바롭스크의 시내에 나가 분수대와 관광지를 돌기도 하고, 숲속에서 불을 피워 샤슬릭을 구워먹기도 하고, 아무르 강을 보며 일몰을 바라보기도 했다.

러시아의 국교는 러시아 정교회이다. 때문에 어느 도시에 가든 어렵지 않게 금색 혹은 형형색의 둥근 지붕을 가진 위와같은 건물을 볼 수 있다. 이제 겨우 스무살 갓 넘은 나에게, 모든 것이 새로운 러시아의 문화는 낯설면서도 약간은 두려운 것이었다. 러시아는 구소련의 시기 공산국가의 형태를 유지했던 나라이다. 현재는 민주주의 국가로 명칭되기는 하나, 그 시기가 오래되지 않았기에 아직까지도 사회주의적인 면모를 직,간접적으로 많이 볼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실내에 들어가면, 두꺼운 외투를 벗어 보관하는 장소가 별도로 있었는데 이 곳에 외투를 맡기지 않고 외투를 입고 돌아다니면 문제가 되는 것도 나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문화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에 대해 질문을 하자, 강사에게서 "러시아 사람은 규칙에 불복하지 않는다"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에 비로소 나는 러시아가 과거 공산주의 국가였다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된 경험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차갑고 시린 경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겨울에는 모두가 모자를 쓰고 돌아다니는 러시아, 그것을 몰랐던 나는 내 머리에서 김이 폴폴 올라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버스정류장에서 벌벌떨며 서있었다. 러시아가 춥다는 것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몸소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20대였다. 저 멀리서 두꺼운 외투를 입은 아주머니가 잰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와서는, 왜 바보같이 모자를 쓰고있지 않는거냐며 나를 나무랐다. 아주머니의 말투만 본다면, 마치 내가 큰 죄를 진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또다시 아주머니들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내 머리를 잘 감싸고 다녔다.


이게 감옥과 다를바가 뭐냐고 여겼던 기숙사에서 러시아 친구들과 몰래 생일파티를 했던 날, 언어교환을 하자며 작은 소녀가 내 방문을 두드렸던 날 그리고 다같이 클럽에 놀러갔다가 다음날 숙취에 좋은 러시아 음식이라며 보르쉬(맑은 국같은 러시아 음식)에 마요네즈를 넣어 먹었던 날.. 진흙에서 연꽃이 피는 것 처럼 힘든 날 속에서도 즐거운 시간은 존재했다.


그러나 나는 그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년의 교환학생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강한자만 살아남는 나라'. 그것이 러시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이곳에서 버틸만큼 강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결과에 도달했고, 미련없이 하바롭스크를 떠났다.


그것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러시아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다시 러시아 땅을 밟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 대학 졸업을 몇달 앞둔 때였다. 배운것이 도둑질이라는 처절하고 잔인한 말은 도데체 누가 만든 것일까.


취업을 앞둔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조건을 내민 회사는 모스크바에서 멀지 않은 도시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한국회사였다. 러시아라니, 내가 다시 러시아에 가서 살게 된다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주거지 제공, 차량 제공, 식비와 핸드폰 제공이라는 금전적인 이득 앞에 취업전선에 내몰린 사람이 흔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렇게 많은 금전적 보상이 있다는 것은, 그 자리가 그만큼 힘든 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나에게 살면서 가장 큰 성장통을 겪은 시기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큰 망설임 없이 러시아에서 생활하였던 이 두 시기를 꼽을 것이다. 오전 8시가 되기 전에 출근하여, 밤 9시,11시까지 근무하는 것이 허다했고 토요일 근무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모두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버텼다.


그렇지만 학생신분으로 러시아에서 생활 할 때와, 직장인으로서 러시아에서 생활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바로 금전적 자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회사 밖에 있을 때에는 내가 번 돈으로 여행도 갈 수있고 옷도 마음껏 살 수 있었으며, 먹고싶은 것을 잔뜩 먹고 취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집이 마치 내 것인냥 들떠서 '이것이 과연 돈의 힘인가!' 하는 기분에 잔뜩 취해 SNS에 일기를 쓰는 흑역사도 이때 많이 참 생성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당시 스트레스 받아 충동구매 했던 물건들은 다음 날 바로 정신차리고 환불했다는 점과 괜히 헛바람들어 명품에 기웃거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사실 명품을 생각할 만큼 돈을 벌지도 못했기에 명품은 택도 없는 소리이긴 했다). 대신 술 좋아하는 러시아 친구들과 술도 참 많이 마시고, 모스크바와 상뜨뻬제르부르그 그리고 근교의 다른 유럽 국가들로 여행을 자주 다녔다.

처음 도착한 모스크바의 모습은, 의외로 나에게 큰 설렘을 안겨주었다. 나의 첫 러시아 도시였던 하바롭스크가 회색빛의 도시였다면, 모스크바는 세련되고 반짝이는 신식의 도시같은 느낌이었다. 사람들도 회색이나 검은색 옷이 아닌 다양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다녔고, 관광지에서도 영어를 구사하는 젊고 밝은 러시아 친구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당시 하바롭스크에서는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거의 보기 어려웠다). 러시아는 영토가 워낙 크기 때문에, 도시마다의 분위기 차이가 크고 똑같은 러시아어도 발음이나 억양도 굉장히 다르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알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교환학생을 갔었던 하바롭스크는 서울에서 비행기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도시이고, 모스크바는 11시간에 걸쳐 와야하는 머나먼 곳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나라임에도 이렇게 분위기가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몹시 신선한 충격이었다.


학생으로서 지낸 러시아도, 근로자로 지낸 러시아도 나에게 결코 호락호락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기간을 유지할 수 있었 던 이유는 러시아어가 미숙한 나를 자신들의 세계에 기꺼이 초대해 주었던 러시아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처에 친구도 가족도 없이 매일 회사와 집을 반복하는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가족들과 친구들을 소개해주었던 발랴. 그리고 하루가 머다하고 나를 동네 곳곳의 레스토랑에 데려가주었던 싱글맘 나쟈는, 내가 외로움에 몸서리 칠 때마다 늘 곁에서 함께 해 주었던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평일에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주말에 한국 음식이나 라면따위를 먹으며 한국방송을 보는 낙에 살던 나를, 매주 새로운 러시아 친구들과 새로운 러시아 문화를 접하도록 던져주었던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당시 아마 큰 마음의 병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러시아에서 생활하였던 기간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화려한 건물도 맛있는 음식도 아닌 그 시절의 나와 함께 해 주었던 사람들이었다. 수천장의 사진 속에서 내가 골라 낸 몇 장의 사진은 대부분 그 당시 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내가 러시아를 단지 여행으로 갔다거나, 같은 한국인 직원들과만 시간을 보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그들의 문화와 사회를 조금이나마 더 알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출근해서는 숙취로 맥을 못추고 있던 나에게 잠시 나와보라며 불러내서는 커다란 맥주캔을 건네며 "자, 이 맥주 원 샷 해. 숙취엔 술을 마시는게 직빵이라고!"라고 말하던 70대 할아버지 직원, 가끔가다 작은 러시아 간식이나 러시아 장식품등을 선물이라고 주면서 잔뜩 들뜬 표정으로 러시아 문화를 설명해 주던 나이 지긋한 또 다른 할아버지 직원. 그들의 그 따뜻한 마음이 퍽퍽하고 차가웠던 나의 첫 직장 생활과 러시아 생활에 잊을 수 없는 기억 한 조각으로 남았다.


엄청나게 추운 날이면 성큼성큼 바에 들어가 샷을 한잔 들이키고는 "빠이죰!"(가자!)라고 호탕하게 외치던 블라디 미르. 러시아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며 밤새도록 술을마시고는 다음날 머리통이 깨질 것 같다고 울부짖던 그 친구들이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엄청나게 취한 상태로 힘겹게 눈을 부릅 뜨며 나에게 "한국은 주변에 강대국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고유한 언어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거야?"라고 물어보던 티모시는 내 대답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아시아인을 처음 본다며, 나의 눈이 신기하다고 말하던(지금 생각하면 그냥 취했거나, 추파를 던지려다 실패한게 아니었을까 하는 질문이기는 하지만) 안톤은 그 이후에 더 많은 아시아 사람을 보았을까?


너무나 힘겹고 처절했던 스물 네살의 나와 함께했던 그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내가 그들 덕분에 그 시기를 지나올 수 있었고, 그 시간 덕분에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을 전한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일까.

나에게 러시아란, 어떤 나라인가 생각해 본다. '러시아' 하면 떠오르는 내 감정을 설명하자면 마치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처의 딱지나 흉터같은 이미지가 연상되는 그런 나라이다. 나에게 너무나 모질게 굴었던 나라, 그러나 그 시간이 더이상 상처가 아닌 내 일부가 되어 나와 함께 살아가게 된 나라. 나의 20대초의 미성숙한 모습을 고스란히 다 뿌리고 온 나라. 사랑하는 나라라고 말하기엔 너무 고통스러운 나날이었고, 증오한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많은 따뜻한 사람을 만난 곳이었다. 나에게 러시아란 그런 나라이다.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이 애증하는, 나의 러시아.


그 곳에 어서 평화가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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