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게 건넨 두 번째 답은 '떠나고 싶어!'였다.
그래서 떠났다.
여행의 참맛을 보았다! 일본 여행
20살 때 꿈이 있었다. 한참 배낭여행 붐이 일기 시작했으므로, 유럽으로 가방 하나 메고 떠나고 싶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아르바이트는 찬성하셨지만, 배낭여행은 반대하셨다. 그러자 나는 아르바이트도 하기 싫어졌다. 그러면서 해외여행에 대한 관심은 0이 되었다.
그러나 퇴직 후 우울하게 늘어져있는 나에게 어디라도 다녀보자고 계속 권유하는 동생으로 인해 여행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이른바 할머니 코스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 여행 다니는 동안 신체의 안전이 확보되어야 하고, 여행 보험이 제대로 적용되어야 하며, 침대는 매우 편안해야 하는, 프로그램 안에 '힐링' 또는 '휴식'이 제공되는 패키지여행을 선호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선택한 곳은 이웃나라 일본이었다. 평소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았기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고, 특히 휴식을 취하기 위해 온천이 있는 곳으로 선택했다.
영화나 만화에서 접했던 일본어를 직접 사용해보니 무척 신이 났다. 세계 어디서나 쓰는 표현,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이거 얼마인가요? 1개(또는 2개) 주세요.' 이런 말 정도인데도 일본어로 물건을 사고 인사하고 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왜 여행을 가는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7개월짜리 백수 놀이와 맞바꾼 캐나다 여행
해외여행의 맛을 본 후 또 어디론가 가고 싶어 졌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는 일은 삶에 활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단기 선교로 동남아 지역은 자주 가봤고, 중국 하얼빈에서 3개월 정도 지냈기에 동양권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가보고 싶었다. 유럽과 미주 지역 둘 중에 하나는 가보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여행은 쉼이다'라는 지론을 세운 나와 동생은 이번에는 대자연을 누려보자는 의미에서 캐나다로 여행지를 결정했다.
당시 나에게는 1년 정도를 더 백수로 지낼 수 있는 여윳돈이 있었다. 캐나다로 정한 것은 너무 좋았다. 여행 상품 내용도 꽤 맘에 들었다. 그렇지만 캐나다 여행을 간다는 것은 백수로 지낼 시간을 단축한다는 뜻이므로 아주 심란해졌다. <미움 받을 용기> 에 나오는 청년이 소개한 친구처럼 우울증 환자 대우를 계속 받고 싶어 좀 더 백수로 지내고 싶었던 것이다. 여행 전 이 문제로 동생과 다투기도 했다. 그러나 캐나다에 너무 가고 싶었으므로 꽤 긴 시간 놀고먹을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여행해본 나라들 중 가장 좋았던 곳 1곳만 꼽으라면 캐나다를 선택할 정도로 여행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아메리카 대륙은 정말로 넓었고 평온했다. 여행은 밴쿠버에서 시작되어 로키산맥이 있는 캘거리를 거쳐 나이아가라가 있는 토론토로 이어지는 코스였다. 제일 기억에 남는 곳은 로키 산맥이다. 밴쿠버에서 캘거리로 넘어갈 때 탔던 비행기는 캐나다 국내 여객기로, 총좌석이 100석이 될까 말까 한 무척이나 작은 비행기였다. 비행기가 작은 만큼 지상에서 낮은 고도로 날 수 있었는데, 로키 산맥을 횡단하는 중이라 계속해서 변화무쌍한 여러 산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약 2시간 이상 쉬지 않고 산맥을 감상하느라 잠도 자지 못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캘거리 공항에서 내려 여행 버스를 타고 밴프로 가던 중 잠이 들었다. 갑자기 가이드님이 큰 소리로 깨워서 잠이 깼는데 이번에는 거대한 산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국에서 절대 볼 수 없는 높이의 산이, 무척 멀리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가까운 곳에서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사회 책에서나 보던 로키 산맥을 위에서도 옆에서도 여러 날 동안 바라보며 마음속에 태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한국, 살던 마을, 교회, 학교, 만나던 사람들에서 벗어나 평소 상상조차 못 하던 규모의 대자연을 만나는 것은 나의 마음과 영혼을 정화하기에 충분했다. 백수의 삶에 대한 미련은 여행 중 사라져 버렸다.
삶의 의지를 다진다! 제주 여행
캐나다에서 돌아온 후 동생과 나는 캐나다 앓이에 빠졌다. 캐나다 이민을 가고 싶은 마음에 연구하고 조사하느라 몇 날 며칠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몇 주 후 결국 둘은 현실을 맞닥뜨렸다. 이민을 가도 가장 잘 된 사람이 공무원이라는 현실, 캐나다로 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 비용(약 3000만 원 이상)이 수중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공무원이 되기로 했다. 남은 돈을 몽땅 공무원 시험 준비에 투자했다. 국가직 시험을 목표로 열심히 달렸다. 갑자기 공시 정책의 변화가 있었고, 국어 과목 문제 유형이 너무 급작스럽게 바뀌어 떨어지고 말았다. 정말 느낌적인 느낌으로는 딱 2개월만 더 하면 붙을 것 같은데... 가진 돈이 전부 바닥나 버렸다.
결국 각자 살 길을 찾아가기로 했다. 나는 다시 기간제 교사를 하고, 동생은 수채화 레슨을 하기로. 그전에 의지를 다지기 위해 여행을 가기로 했다. 짧게 그러나 일상을 확실히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여행지는 제주였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은 늘 들뜨는 일이었고, 우리나라여서 비용은 저렴하지만 분명 해외에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맘에 들었다.
1박 2일 코스로 자유여행을 계획했다. 가고 싶었던 해변 앞에 있는 깨끗하고 저렴한 숙소를 선택하고, 버스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포인트 지점을 골랐다. 둘만 다녀보니 편하기도 하고 일정을 조정할 수 있어서 좋았다. 맛집을 찾아 1시간 넘게 걸어도 보고, 예쁜 기념품을 사러 다니기도 했다. 때마침 한림공원에서 부겐빌레아 축제가 있어 예쁜 꽃들과 멋진 야자수들을 실컷 구경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동생은 사실 공무원 준비를 하러 독서실에 다닌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완전히 낫지 않은 언니를 돌보기 위해 함께 다녀준 것이었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해주어서 나와 동생은 모의고사 성적이 꽤 괜찮은 편이기도 했으니, 동생이 나를 위해 해준 일들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르겠다. 돌아보면 아팠던 언니가 다시 학교에 가서 기간제 교사를 하겠다고 할 정도로 나아졌으니 이제는 좀 쉬고 싶었던 맘이 들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암튼 제주 여행을 통해 우리는 캐나다와 공무원 시험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마음을 다질 수 있었다. 여행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마음의 짐을 털어내는 좋은 시간을 보냈다.
여행은 건강한 사람에게도 무척 좋지만, 특히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좋다. 그 이유는 첫째, 우울한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계속 힘든 이유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황에 함몰되어 있어서다. 이럴 때 멀리 떠나는 것은 얼룩진 마음을 씻어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둘째,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평소대로 굳어진 패턴대로 살기가 쉽다. 그러나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새로운 방식으로 친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발견이자 자아가 확장되는 경험이므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자신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 여행이 일상의 삶에 활력소가 될 수 있다. 우울한 사람들은 늘 자신의 우울함에 지쳐있다. 그러나 여행 중 경험한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의 역동성은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에 바람직한 자극이 된다. 피곤하고 지칠 때, 여행 중 보았던 것들, 먹었던 것들을 떠올리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치유능력이 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여행은 아주 먼 곳이 아니라 집 주변에서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행을 하고 있다'라는 발상의 전환이다. 우울하다 말하는 이들은 우울한 환경에 자신을 버려두는 경우가 많다. 정말로 우울증을 끝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일어나 어디라도 가보라. 우울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분명 즐거워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