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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ftable Apr 26. 2024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어쩔티비

우리의 직관으로 삶을 마주하는 방식

아버지의 실험실 책상 위에 걸린 다윈의 인용구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라며 꾸짖었다.


주인공인 그녀의 아버지는,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내지 않는 딸을 답답하게 여겼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생명이란 것을 즐기며 살면 안 되느냐" 라며 그녀를 꾸짖었다. 그러나 딸은 반대로 생각했다. 어차피 우주의 티끌보다 못한 인생이라면, 왜 살아야 하는가? 주인공은 이러한 비관주의 속에서 여러 불행을 겪던 중,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거의 유명했던 분류학자를 발견하고 그에게 매료된다. 그 분류학자가 살아온 인생에서 자신이 깨닫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의 일대기를 탐험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데이비드라는 분류학자는, 어떠한 실패를 겪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어났다. 그가 한평생을 수집해 온 물고기들이 화재로 인해 사라질 때도, 그의 아내와 제일 편애하던 딸을 잃을 때에도, 다시 한번 강지진으로 물고기들과 그들의 이름표가 전부 땅속으로 떨어져도,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녀는 의구심을 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이렇게나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 그는 어떻게 새로운 물고기 종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싸울 수 있었는가? 그녀는 낙관론적 자기 최면에서 그 답을 찾는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 내가 나인 것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 그렇게 자존감을 높임으로써 그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나 동시에, 그는 앞만 보고 나아가다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그는 우생학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지능이 남들보다 떨어진다고 해서, 가난하다고 해서, 사람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불임수술을 하는 것을 누구보다 옳다고 믿었다. 또한, 그의 자리를 위협하던 부인을 살해했다는 정황도 드러난다. 그의 이 행동들에겐 대의가 있었다. 더 나은 나라를 위해서, 더 나은 사람들을 위해서, 1000여 종이 훌쩍 넘는 종류의 물고기를 발견하고 분류학에 크게 기여하는 자신이 그런 나를, 나의 임무를 위협하는 한 여성의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확신.


주인공은 그의 일대기를 보며 혼란을 느낀다. 이 사람은 나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일개 악당에 불과할 뿐이었다니.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금 의구심을 품는다. 그렇게 똑똑한 그가 이런 행동들에서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고. 그럼 대체 왜?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그의 폭력을 합리화하게 만들었는가?


그는 그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가 맞다고 믿어온 것들이 사실은 아니게 된다면, 그의 세계는 무너지고 혼돈이 드리울 것이다. 그가 믿는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고 시초로 돌아가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편안한 일이다. 자기 최면의 일부요, 스스로에 대한 가스라이팅이라 할 수도 있겠다.


데이비드가 죽고 한참 뒤, 우리가 부르는 어류, 물고기라는 종류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우리가 외형을 보고, 단순히 물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어류로 묶어 편하게 부르고 있었다고, 유전자를 조사해 물고기들의 조상을 따라가면 전부 다른 동물들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폐어와 연어, 그리고 소. 세 마리의 동물 중 제일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한 마리가 무엇일 것 같냐는 질문을 해보자. 청중들은 당연히 소를 고르지만, 답은 연어였다. 폐어와 소는 호흡을 하게 하는 폐와 유사한 기관이 있지만, 연어는 없다. 물에 산다고 전부 물고기라면, “시끄러운 동물은 모두 포유동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평생을 물고기의 종을 분류하던 학자가 이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 그가 지금껏 믿었던 모든 것이 언어 자체부터 붕괴된다면, 거짓과 자기 최면으로 이루어진 그의 삶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언어와 명칭에 갇힌 거짓 안에 살면 안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거짓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검은 고양이를 보았다고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잔다고 죽지 않는다는 걸 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참이던 명제가 오늘 거짓이 될 수도 있다.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니다. 그저 의미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내가 살아갈 이유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고 생각해 보자. 지금 나의 경우엔 음악이다. 음악을 쓰는 것이, 내 음악을 다른 이가 듣는 것이 나의 하루를 살아가게 한다. 근데 그것이 전부 잘못된 일이라면?


자칫 잘못하면 비관론자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결국 단어의 의미도, 사회적 제도와 지위도, 우주의 먼지의 발톱 때만도 못한 우리의 인생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내가 우주에게는 의미 없는 존재일지 몰라도, 내 친구와 가족의 기억엔 남아있는 존재다. 내가 곡을 쓰는 이유가 우주에 도움이 되려고, 혹은 음악이라는 단어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아니다. 그런 거짓으로 덮어쓴 세상 말고도 내가 하루를 살아갈 이유는 충분하다. 봄 정오의 햇살은 따듯하고, 커피 한잔은 내 몸을 녹이고, 누군가 나의 곡에 좋아요를 누를 때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근데, 근데요, 정작 중요한 것은요, 물고기는 진짜 전혀 신경 쓰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물고기라는 언어 속의 이름은 이제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물고기는 항상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가 가야 할 길, 찾아야 할 행복, 옳은 가치관. 이런 통념들은 사회적, 언어적 틀 속에서 늘 바뀌는 것들이지만, 우리가 직관으로 느끼는 행복은 전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갑자기 사과가 바나나로 바뀐다 한들, 우리는 그 과일을 먹고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매일 아침 깨어난다.


혼돈뿐인 세상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언제든 거짓이 될 수 있는 나 자신의 생각의 틀에 속지 말고, 열린 마음을 가지자. 열린 마음속 나의 직관을 믿고 사랑하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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