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부분을 짐작하는 사이

남편 관찰기② 이 정도가 딱 좋아 그지?

by soft breezes

오늘은 하루 종일 남편의 글을 쓸 생각을 했다. 하루 종일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것. 생각보다 많이 로맨틱하잖아...? 후후 그러나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걸. 시작만 하면 물꼬를 트고 이어질 것만 같은데 말이야.


어제는 날이 엄청 추웠다. 어제의 나는 수술 후 3개월이 되는 날이라 병원도 다녀오고, 아이가 학원 간 사이 부랴부랴 청소도 했고, 아이의 아침과 점심을 챙겼고, 피티도 받았고 유산소도 했고, 은행에 들러 일도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무려 로또 2등을 41번이나 했다는 명당에서 즉흥적으로 로또도 샀다. 이렇게 알찬 하루라니. 누군가에게 칭찬을 듬뿍 받고 싶은 날이랄까. 역시 그런 날엔 남편에게 생색내기 딱 좋다. 아이가 방학이어도 쉴 틈 없이 바쁜 나의 일과를 이해받고 싶었나 보다.


남편은 나와 다른 사람이므로, 때로는 나의 투정을 받아주지 못하기도(안 하는 걸까) 하고 공감받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남편은 매우 (내가 보기에) 이성적이고 매우 (과할 정도로) 효율맨이기 때문이다. 몇 년째 남편의 번호는 '효율맨'으로 저장되어 있다. 반면에 나는 매우 (남편이 보기에) 감정 소모가 많고 매우 (과할 정도로)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고 시간을 할애한다. 글쎄 남편은 나를 요즘 뭐라고 저장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남편의 인정을 받고 싶었는지 그렇게 어제의 일을 읊어대었고 남편은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다. 남편은 항상 그렇다. 남편의 어제는 어땠는지 문득 궁금했지만 그는 나처럼 하루의 일을 재잘대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나도 그냥 잠깐 떠오른 궁금증을 거두었다. 아마도 그는 더 바쁘고 더 힘든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연말부터 시작된 교육 일정으로 새벽같이 일어나서 한시간 넘는 거리를 운전해서 대학교에 간다. 나에겐 무거운 쇳덩이로 보이는 노트북을 펼치고 수업 중에 조금은 졸고, 조금은 끄덕이고, 조금은 지쳤을 것이다. 나였다면 좀 더 투덜대고 좀 더 불평하고 위로를 바랐을 것 같은데 그는 그렇지 않다.


직장이 아닌 학교로의 출퇴근은 물리적 거리도 심리적 부담감도 있었을 것이다. 심한 감기에도 병원 갈 시간이 없었다. (요즘 부쩍 집에 오기만 하면 누워있으려는 모습이 밉기도 했지만은) 내가 보지 못하는 그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 보니 내심 짠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그랬다. 요즘 아빠의 뒷모습만 봐도 짠하다는 생각이 든다나. 흐음 그게 무엇일까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조금 아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부부란 한 사람에 대해 불만을 순식간에 백 개쯤은 거뜬하게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와 다른 남편의 다른 점을 막힘없이 나열할 수 있었던 만큼. 다른 점이 미운 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은. 오늘은 남편의 무던함이 부러워진 날이다. 오늘은 무슨 점심을 먹었는지 궁금해하고, 이모티콘 무료 이용권을 공유하고, 이제 퇴근했다고 전화하는 사이. 오늘도 그 사람은 한 번 시작한 기침을 한동안 하다가, 아침에 손수 내려간 커피를 마시고, 학교 식당에서 정갈하게 나온 점심을 먹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어제의 다른 점 리스트에 다음을 업데이트했다.


- 자신의 생일에는 돈가스만 있으면 된다는 사람.

- 손목에 기름 화상을 입어도, 심한 감기에 걸려도 병원에 잘 가지 않는 사람.

- 자신이 손수 내린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사람.


미역을 한 움큼 불리고 소고기를 넣은 국을 끓였다. 내일은 팥밥을 해야지. 큰맘 먹고 산 투뿔 불고깃감으로 스키야키를 해야지. 남편의 생일이 1월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유 있는 1월에는 손수 생일상을 차려줄 수 있다. 십 년째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어서, 옆에서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어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일에 큰 감흥이 없다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무던한 남편의 무던한 반응이겠지만(대체로 호들갑 떠는 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편), 나는 이제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짐작할 수 있으니 괜찮다. 1이 세 번 들어가는 남편의 생일, 축하해. 1이 세 번이라니. 꽤 멋진 날짜잖아. 우리 내일 저녁에는 어제 명당에서 산 로또를 함께 맞춰보자구. 물론 로또가 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만약 된다면, 절대 1등 말고 2등으로. 응? 그게 적당하잖아. 그 정도가 딱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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