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다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우리가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인정받는 것은 또 다른 일인 것 같습니다. 보통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제법 괜찮아 보일 때 혹은 어리숙함을 벗어 성숙해진 사람에게 ‘사람이 되었다.’ 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제가 사람이 되었던, 그 계기가 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은 제가 21살이 되고 처음 입학한 대학교에서 만났습니다. 저보다 한 살 많은 언니였습니다. 저와 같은 대학을 다녔고, 이미 졸업해서 A과의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언니와의 첫 만남은 2017년 4월 25일 입니다.
Chapter 1. 2017년 4월 25일
저는 1년의 재수를 마치고 서울의 모 전문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저는 이 학교에 정을 붙이기 싫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화학분야의 연구원이 되는 목표가 생겼는데, 저는 정보과에 입학했습니다. 하고싶지 않은 공부를 해서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 지 막막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컴퓨터 학과는 전도유망 했음에도,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다시 공부할 수 없다고, 열심히 보낸 나의 1년을 세상이 배신했다고 원망만 늘었습니다.
저는 인간관계에 비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번에 친구들과 멀어진 일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제 거지같은 인성 때문이었지만,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 것인지 시간이 지나도 똑같았습니다. 나의 잘못은 돌아보지 않고, 남 탓으로 돌리기 바빴습니다. 나는 상처받은 사람이고, 피해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얼굴은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이기적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같은 나이에도 나는 무언가 인생의 진리를 관통한 사람처럼 우쭐했습니다.
언니를 처음 만난 그 날도, 저를 찾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건물을 나왔습니다. 중간고사 시험을 보고 나온 친구들이 서로 답을 맞추고 있었는데, 저도 와서 같이 하자고 합니다. 어이없었습니다. 공부도 못해본 것들이니 답이나 맞추고 있다고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이름을 부르는 친구들의 말을 못들은 체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습니다. 모퉁이를 돌면 그제서야 씩씩거리며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다음 시험을 위해 교내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학교는 어떻게 이런 업체를 찾아냈는지 참 대단합니다. 메뉴가 획기적이고 도전적입니다. 짜장면에 쫄면을 쓰고, 김밥을 볶아서 줬습니다. 그나마 먹을만 했던건 제일 싸고, 빠르고, 실속 있으며, 실패 위험이 적은 라면이었습니다. 라면도 제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 면은 덜 익히고 국물은 짜게 만들어 달라고 항상 요청하는 게 번거로웠지만, 500원에 밥 추가까지 하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라면을 시켰고, 쟁반에 받아 사람 없는 한적한 곳에 앉았습니다. 야무지게 먹고 있던 중, 누군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심심해서 그런데… 밥 같이 먹어도 될까요?”
이기심이 만연한 이 개인주의 사회에서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 심심하다는 생각을 하다니. 혼밥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불쌍해 보였습니다. 당연히 괜찮다고, 얼른 앉으시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제게 자신의 나이와 이름을 소개하더니, A과에서 조교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습니다. 이 사람과 친해지면, 저의 동기들과는 차별화된 인간이 될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서의 좋은 정보도 내가 제일 먼저 받을 수 있고, 다른 동기들에게 소개해줄 때 어깨가 으쓱 할 것 같았습니다. 여러가지 계산을 마친 저는 제 앞에서 조용히 수저를 들고 저를 쳐다보는 언니에게 두서없이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밥을 다 먹은 우리는 퇴식구 앞에서 물을 마시며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습니다. 당시 저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Chapter 2. 마음이 열렸다.
언니와 만나면 내 학교 생활에 도움될 정보들이 가득할거라는 기대와 달리, 제 이야기만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항상 무슨 그런 진지한 얘기를 하냐며 넘어갔던 나의 인생 철학이나 거침없는 세상을 향한 비난도 묵묵히 들어주기만 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글썽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언니는 가끔 자신의 이야기를 했었는데, 저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지’, 그 당시 어떤 기분과 느낌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쉽게 입 밖으로 내 뱉을 수 없는 공감. 무턱대고 네 마음을 안다고 얘기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는지 알기에 쉽게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4시간 동안 구구절절 내 얘기만 들어주던 언니의 서글픈 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가시 돋았던 마음이 조금씩 그 원형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거대한 성을 쌓고, 밖을 내려다보며 하찮게 여겼던 제 모습을 정직하게 마주했습니다. 일면식으로 잘 지내는 친구마저 없기에 우스갯소리로도 꺼낼 수 없었던 나의 이야기. 그저 속 터 놓고 얘기했을 뿐인데, 제 인생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들어줄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몇 시간을 그저 젖은 눈으로 듣기만 했습니다. 이것이 친구를 향한 순수한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제 말에 집중해 자신의 일처럼 가슴 아파하며 들어주었던 그 분의 헌신이 저를 바꾸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고 저는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그 분을 만난 뒤로 저는 달라졌습니다.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니 세상을 보는 시야도 긍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거지같았던 학교에 애착이 생겼습니다. 오히려 내가 이 학교에서 더 많이 배워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프로그래밍이 재밌어졌습니다. 사람에게 관심도 생겨 관찰하기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관찰과 질문을 똑같이 따라했습니다. 자연스레 무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각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은 참 다양하고 복잡하고 흥미롭기에 쉽게 판단할 수 없겠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미친 사람처럼 제 멋대로 행동하는 것도 그만두었습니다.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뿐인 동생이 이제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사랑스럽습니다.
Chapter 3. 나의 사랑 방식.
저희 아버지는 지금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복잡한 환경에서 자라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는 자신의 꿈을 뒤로하고 여동생과 서울에 상경하여 생계를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할머니는 아버지께 ‘글쟁이가 되면 가난해질거다.’ 라고 극구 반대하셨습니다. 뒤늦게 아버지는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하셨습니다. 학교에서 과 대표를 비롯해 수많은 학생회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무역 회사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된 것 입니다.
사람에 관심이 생긴 저는 제일 먼저 가족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제가 미워했고 한 때는 원망했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삶이 어땠는지, 아버지의 청춘은 어땠는지 너무 궁금해졌습니다. 아버지의 젊은 날의 초상, 그건 제가 그려온 것들과 비슷했습니다. 나와는 무관할 줄 알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내 안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처음이셨겠지요. 그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신과 쏙 빼 닮은 딸에게 사랑을 표현하시는 것에 서투르셨나 봅니다. 줄곧 화를 내셔도 그게 사랑이었습니다. 딸이 밥상 앞에서 감사함을 모를 때, 수저를 던지며 혼 내시는 것도 저를 향한 사랑이고 걱정이셨습니다. 아쉬움은 분노로, 미안함과 후회는 눈물로 표현하셨습니다. 언니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나의 방식이 내가 비난했던 그 사랑의 방식과 같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싫어서 도망치는 건가요? 내 얘기 듣다가 지쳤나요? 맞아요, 이제까지 그래왔기 때문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어요. 들어줄 마음 없으면, 차라리 만나지 말자고 하지 그랬어요. 언니가 진짜 싫어요. 짜증나니까 저 집에 갈래요.’
단지 헤어짐이 아쉬웠을 뿐입니다. 보기만 해도 피곤한, 온갖 가시 돋힌 말로 아쉬움을 표현했습니다. 저는 너무 서툴렀지만, 언니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었습니다. 그 덕에 저는 변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솔직한 마음을 잘 표현하려고 싶어서요.
‘나는 정말 부족한 사람인데, 좋아해줘서 고마워. 헤어지기 정말 아쉽다. 이런 나를 이해해줘서 고마워. 넌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내가 많이 보고 배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Chapter 4. 친구
우리는 최근 들어 공통분모가 생겼습니다. 서울의 핫 플레이스를 다니며 맛있는 것을 먹고, 예쁜 카페 찾아 골목을 누빕니다. 한 때는 엄마처럼 느껴졌던 언니도 이제는 함께 할 때 친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드디어 대화가 가능합니다! 오고 가는 게 가능합니다. 한 쪽만 무자비하게 툭툭 던지는 만남은 이제 끝났습니다. 나도 이제는 언니의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언니는 자신의 삶과 자신의 뚜렷한 가치관을 전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던 저는 들어도 듣지 못했고 기억할 수 없었던 것 입니다.
이제 언니 직장인, 나는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각자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전처럼 자주 만나 오랜 시간을 보내는 건 어렵게 되었지만, 시간 내어 만나는 날엔 너무 기대됩니다. 그 분은 제가 사람 답게 살 수 있도록 계기가 되는 은인이십니다. 제가 받은 만큼 저도 언니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진작에 포기했습니다. 갚을 수 없습니다. 여전히 만나면 그 분의 사소한 행동 속에 인사이트가 있습니다. 배울 것도 많고, 물어볼 것도 많습니다. 자연스럽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에게 고마워하기를 바래서가 아닙니다. 괴로움의 늪에 묶여 있을 때, 자유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랑을 값없이 누렸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