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이 이동희에게
나는 사람을 한 줄로 정리하여 기억하는 것을 선호한다. 사람 이름을 잘 기억 못하는 나에게 그 사람의 성격, 취향, 선호 등을 같은 방향성을 가지게, 한 줄로 기억하는 것이 유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성격이 취향과 선호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통용되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동희이다.
동희는 2001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부모님과 여섯 살, 세 살 차이 누나로 구성된 가족은 동희가 어릴 때부터 자율성을 기를 수 있도록 하였다. 부모님께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늦게 들어와도 걱정하지 않았고, 고등학교 때 잘 나오던 학교 성적을 포기하고 수능으로 대학을 가겠다고 선언하였을 때도, 부모님의 반응은 ‘그래?’ 정도였다. 누나들도 동희에게 유교적인 관념을 강요하지 않았다. 서로 ‘야’라고 부르며 격식 없이 편하게 지내는 환경에 동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놓여졌다. 동희는 자연스럽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주된 것은 자신의 행복에 대한 고민이었다.
동희는 자신에 행복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왔다. 동희가 어렴풋이 찾은 자신의 행복은 ‘행복하기 위해선 행복해서는 안된다.’이다.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몰될 수록 사람은 자신의 주위 현상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복 여부에 대해서만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굳이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꾸준히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상황과의 비교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 동희의 생각이다. 나는 그의 행복론이 그의 자율성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큰 예시라 생각한다. 사실 ‘행복하기 위해선 행복해서는 안된다.’와 같이 얼핏 보면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이 동희 속에서는 매우 당연하게 공존한다.
그가 선호하는 글을 한 번 살펴보자. 동희는 탐미주의 문학을 흠모한다. 책 내용이 아닌 작가의 문체에 더 많은 중심을 두고 책을 읽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인 ‘금각사’와 ‘봄눈’을 매우 선호한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한국 문학을 말할 때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말한다. 보통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면 탐미주의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도 잘 이해 못한 사람이라고 얘기하겠지만, 동희는 다르다. 자기 속에 있는 어찌 보면 모순되는 감정을 모두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사실 사람은 일관되지 못한 동물이다. 누구보다 돈이 싫다고 했던 이들도, 결국 속으로 돈을 갈망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자신의 이상향과 현실이 매우 다른 경우이다. 동희는 이를 인정할 줄 안다. 동희는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 때로는 누구보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싫은 사람이다. 지금의 익숙함을 마치 섬유 유연제와 같이 느끼지 못하며 벗어나고 싶어 할 때도 있지만, 항상 갓 말린 빨래에서 나는 늘 쓰던 섬유 유연제 냄새가 그 어느때보다 좋은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삶은 참 별과 닮았다. 사실 서울에서 보이는 별은 대부분 인공위성이다. 동희는 이런 고민을 한다. ‘내가 보던 저 별이 사실 인공위성임을 알게 되더라도, 나는 저 별을 좋아할 수 있을까?’ 그가 태어난 진주 에서 보던 별은 진짜 별이었고, 서울에서 보던 별은 가짜 별이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별을 사랑한다. 그의 삶이 인공위성이던, 별이던, 그가 어느 쪽인지 우리가 그 별에 가까이 가서 보기 전까지 모르는 상태여도, 우리가 보는 그의 삶은 빛난다.
자신이 수학하는 학문에도, 자신의 미래에도 그는 어느 한 쪽으로 그것을 고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기에, 다른 사람을 누구보다 존중할 줄 안다. 자신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기에 그는 동희일 수 있다. 스스로를 몽상가라 말하는 동희는 누구보다 현실에 관심이 있는 탐미주의자이다. 그렇기에 동희는 누구보다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