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인화
있잖아, 요즘 사람들 대부분은 스스로 속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 같아. 내가 느끼기엔 자기 얘기를 잘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일까?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숨겨둔 속얘기가 있어 자기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뭐, 사실 그 사람들이 자기 최면을 거는 것 같다고 욕하려고 말한 건 아니야. 그냥, 왜 자기 얘기를 안 하는지 궁금해서. 아마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러냈다가 상처받은 경험이 있어서 그래서 그런 거겠지? 아니면 상처를 받지 않았어도 나를 온전히 드러낸 걸 후회하기 싫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참, 사람들은 후회하는 걸 싫어해. 나도 그렇고.
인생에 있어 무엇이 후회되는지 묻는 질문에 너는 뭐라고 대답할 거야? 이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별로 후회되는 게 없어서 대답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계속 생각해보니 온갖 것들에 미련이 남아서 대답을 할 수가 없더라. 내 인생은 후회 투성이야. 주말을 어떻게 보내든 후회하곤 해. 침대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리면 좀 생산적으로 보낼 걸 자책하고, 주말 내내 친구들을 만나면 홀로 휴식 시간을 가질 걸 후회하고. 시험 기간에 공부하느라 주말을 보내면 미리 하지 않은 과거의 나를 원망하고. 뭘 해도 만족하는 법이 없어. 주말 뿐만 아니라 매일을, 1년을 후회로 채우며 보내는 것 같아.
내 인생이 순탄치 않은 건 확실한데, 그렇다고 큰 굴곡이 있지는 않아. 난 분명 지쳐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힘들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울 만큼 내 삶은 잔잔해. 별 거 없는 생은 자질구레한 미련과 후회로 채워져 있어. 그래서 인생에서 후회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 것 같냐고 묻는 질문에도 대답할 수가 없었어. 고3 때 부장 선생님 말 안 듣고 입시 전형을 마음대로 쓴 걸 돌이켜 보는 건 좀 웃기잖아. 나 이제 대학교 3학년인데 고작 이런 유치한 이야기를 떠올렸다는 게.
그런데 있지, 후회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닌 것 같아. 지나가는 엄마의 한 마디와 아빠의 한숨, 친구들과 선생님의 염려의 목소리가 모이면 그렇게 아쉽지 않았던 것도 되게 아쉬워져.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최선의 기준에서 내가 빗겨 나가 있기 때문에 나오는 탄식인 거지. 결국 세상에는 완벽함이 정해져 있고 나는 완벽에 도달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거야. 나만의 것도 아닌 걸로 괴로워 하는 게 참 씁쓸해.
덜 괴롭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그래서 고민이야. 후회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걸 그만둘지, 아니면 후회 자체를 아예 그만둘지. 더 정확히는 전자와 후자 중에 뭘 추구해야 할지 고민이지만. 요즘엔 무의식적으로 후회살이를 그만두고 싶어하는 것 같아. 자꾸 뭘 잊어버려. 친구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안나. 월요일에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가물가물해. 분명 별로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후회로 이어질 생각들을 자꾸 버리고 있어. 그런데 또 무서워. 후회로부터 멀어지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도 놓치게 될까봐 마음이 불편해. 나 참 욕심 많다. 후회까지 소유하고 싶어하다니..
그런데 또 요즘은 후회를 두려워하는 걸 그만두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해. 후회할 지도 모르는 일을 하려고 하는 나를 보면.
있지, 이제껏 나는 다른 사람을 싫어하는 것에 별로 거리낌이 없었어. 대부분 나에게 잘못한 사람, 상처를 준 사람을 싫어했으니까 나의 감정이 정당하게 느껴졌거든. 근데 최근에 나를 무척 좋아하는 친구를 싫어하게 됐어. 처음에는 그 친구가 나랑 비슷한 줄 알았어, 아니 나보다 훨씬 똑똑해 멋지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그런데 함께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나와 다르다는 걸 느꼈어. 나랑 정반대의 것을 추구하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단언하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지나치게 이기적인 모습을 보면서 애정을 거두게 되었어. 아니, 그 친구가 미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마음은 멀리 와버렸어.
이렇게 별거 아닌 이유로, 그것도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싫어한다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야. 오히려 내 스스로에게 염오감이 들었어. 그 친구와 겹치는 사람이 많아 계속 봐야하는 상황 때문에, 불편함을 피하고 싶어서 그 친구 앞에서는 웃고 있는 내가 너무 역겨웠어. 그래서 한동안 그 친구를 미워함과 동시에 나 스스로를 경멸했어. 그러다가 이제야 결심했어. 그 친구를 사랑하기로.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니, 네가 콧방귀를 끼고 있을 지 모르겠다. 말만 그러는 거 아니냐며 나를 비웃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진심이야. 구교환 배우 알지? 작년에 우연히 구교환 배우와 이옥섭 감독의 인터뷰 영상을 봤어. 그 사람들은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해버린다고 하더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는 거만한 내가 그 말에 이상하게 꽂혔고, 1년 전에 본 그 영상이 아직까지도 내 주위를 맴돌아. 그리고 스스로에게 역겨움을 느끼는 나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 말이 떠오른 거지. 그래서 한 번 해보기로 했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해보기로. 그래야 나 스스로에게도 당당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먼 훗날의 내가 이런 식으로 마음 먹는 걸 지탄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미운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어쩌면 역겨운 내 모습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되어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나와 맞지 않는 그 사람을 빨리 끊어내지 않아 스트레스 홧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미리 후회를 두려워 하지는 않을래.
갑자기 막 인생이 희망적인 것 같아 보이네. 그러나 이 편지를 마치고 나면 나는 다시 불안함에 허덕여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리 뛰어다니고 저리 뛰어다니겠지. 불안은 나의 불치병이야. 그래도 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아질 수는 있겠지, 하고 너에게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놔. 내 밑바닥을 보여줘 후회할 지도 모르는 내일을 미뤄두고.
2023년 1월, 인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