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는

우울을 향유고래

나는, 이동희

by 에이포


폭우가 오는 날이면, 나는 떠나간 순간과 사람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아팠던 날도 행복했던 날도 그랬었지 하며 반추합니다. 간혹 순간은 돌아오지 않음을 깨닫고, 그들도 나를 기억해 줄까 하는 의문이 들때면 우울에 잠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간은 빗물에 녹아 강물로 흘러갑니다. 화요일도 그런 날이었습니다. 비는 억수같이 내렸고,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평소와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었다면, 내가 추억해야 할 대상이 하나 늘어버린 것뿐입니다.


내게는 강아지가 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 2008년 12월 14일에 태어난 우리 진주가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유독 약했던 지라 어릴 적 모습 그대로 다 커버린 아이입니다.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산책을 나가도 3분 걷다가 멈춰 서서 안아달라고 쳐다보던 아이입니다. 친구는 그런 진주를 보고 주인을 빼닮았다고 했습니다. 약한 몸이, 만사가 귀찮은 것이, 남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당연한 말입니다. 9살 때 이사해 초, 중, 고를 한 지역에서 다녔지만, 제게 가장 오래된 친구는 진주니까요. 학교가 끝난 후 텅 빈 집에도 진주는 있었습니다. 날 누군가가 기다려 준다는 게 너무 당연했습니다. 그 아이가 화요일에 여행을 떠났습니다. 긴 긴 여행을요.


진주가 떠나고 친구가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진주 같은 나, 나 같은 진주. 아무리 생각해도 지당했습니다. 하나 아쉬움을 빼면요. 나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운이 좋아 나의 능력보다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운이 좋아 내 슬픔을 들어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유년기 시절은 부모님과 논쟁을 자주 했습니다. 질리지도 않았는지 논제는 늘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였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공부하기 싫은 아이의 핑계로 밖에 안 들립니다. 부모님은 그런 아이의 투정에도 담담히 당신의 의견을 들려주셨습니다. 공부를 싫어했지만, 이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은 늘 집에 돌아오시면 차분히 자리에 앉으셨고, 언제나 책을 놓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부모님을 보며 자라왔기에 어느새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느꼈나 봅니다. 끝내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처럼 앉아 있었고 대학에 왔습니다. 부모님과의 논쟁 덕분에 억압되지 않은 사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학창 시절도 행운의 연속이었습니다. 나는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자신을 너무 사랑하고, 남에게 마음 줄줄도 모르며, 무언가를 이룰 끈기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로서는 과분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역에 학교가 적은 만큼, 초 중 고를 함께 다니며 많은 친구들과 오래 이어졌습니다. 새로 사람을 만날 때에도 한두 다리 건너면 아는 환경이었기에 공통분모로 쉽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학생회나 동아리 기장도 해보며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나는 외로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우연으로, 또 천운으로 루어진 것을 누구보다 알기에 만약이라는 가정이 늘 따라옵니다. 이런 가정들은 늘 불안도 가져옵니다. 그들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이전에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과 같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은 무수히 불어나 나를 슬픔으로 밀어냅니다. 어떻게든 슬픔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해보기도 했습니다. 결국 영화, 독서, 카메라라는 취미를 얻어 이들을 동아줄 삼아 우울에서 탈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끔은 갑작스레 밀려오는 파도에 삼켜지는 날이 있습니다. 손쓸 새도 없이 그대로 가라앉아 버리는, 우울에 익사하기 만을 기다리는 날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를 구해준 건 진주였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어떤 감정을 부어도 심드렁하던 진주(실제로 관심이 없었겠지만). 오히려 무관심에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노래 제목처럼 '사랑한다는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 날'이 있으니까 말이에요. 진주는 떠났고, 나는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밀실을 찾아야 합니다. 광장에서 벗어나 홀로 유유히 우울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러나 다시 광장으로 향하게 하는 밀실을 찾아야 합니다. 그 밀실에서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밀실에서는 나 아늑함에 취해 영영 못 헤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밀실에서는 광장에서 행복했던 날들을 미치도록 동경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나는 그리워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시간을 기뻐했고, 슬퍼했으며, 사랑했습니다. 내가 떠나보낸 것도 떠나간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시간에 휩쓸려 이별할 수 밖에 없었던 날들을 그리워합니다. 그리움의 부산물로 행복이 나올 때도, 우울이 나올 때도 있겠지만 모든 감정을 향유하길 바랍니다. 나의 마음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다음 주도 비가 옵니다. 늦은 태풍으로 폭우가 내린답니다. 나는 아마 이 비에, 애수에 젖을 것 같습니다. 젖은 몸은 나를 춥게 만들겠지만, 비가 많은 것을 씻겨줄 겁니다. 나 역시 화요일과 같은 비에 진주라는 행운을 떠올릴 것이고, 사무치게 아파할 테지만, 슬픔이 비에 섞여 사그라들길 꿈 꿉니다. 당신은 비를 좋아하시는지요. 그냥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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