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듯 자연스럽게
집으로 가지 않은 것이다.
900번 버스에서 내리면 30미터쯤 걸어서 지하도로 들어간다. 지하도로 길을 건너면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돌계단이 나온다. 돌'계단'이라고 했지만 사실 흙 비탈길에 크기도 표면도 일정하지 않은 거친 돌들이 툭툭 박혀 있는 투박하고 낮은 오르막일 뿐이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작고 오래된 상가가 있고 오른쪽에는 놀이터가 있다. 가끔 놀이터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다. 나도 예전에 담배를 피우긴 했지만, 놀이터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다. 하필 놀이터 옆에 담배를 피우기 좋은 쓰레기통이 있다. 가끔은 (심사가 뒤틀린 채 퇴근하는 날엔 더욱) 그 쓰레기통을 뽑아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한다(물론 사람이 뽑기는 불가능할 정도로 단단히 박혀 있긴 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오래된 아파트라 그런지 큰 나무가 빼곡하다. 역시, 오래된 아파트라 그런지 관리도 잘 안 되어서 제멋대로 크고 울창하게 자라 있다. 철마다 잊지 않고 말끔하게 정리된 도시의 나무들을 보면 왠지 나무지만 차갑게 느껴져 정이 안 가는데 여긴 그렇지 않아 참, 다행이다.
그 지하도를 지나쳐 100미터쯤 더 가면 스타벅스가 있다. 매일 같은 패턴으로 집으로 가기 때문에, 웬만큼 마음을 먹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 지하도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특히 오늘처럼 일찍 퇴근한 날은 스타벅스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두고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Kings of Convenience)나 노라 존스(Norah Jones)를 들으면서 하루키를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다 잠깐 방심한 사이에 그만 지하도로 들어가 버리곤 한다. 돌계단을 지나 놀이터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제야 '아, 지하도를 지나쳤어야 하는데......' 하고는 애꿎은 그 혹은 그녀를 잠시 쏘아보다 집으로 오고 마는 것이다. 집에 와서는 라디오를 틀어 놓고 최신가요를 들으면서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다, 아 나머지는 내일 또 해야지(집안일은 정말 끝나지 않는다), 하고는 아이를 데리러 간다. 아이가 '통통통' 뛰어오면 그냥 또, 히죽.
오늘은 별생각 없었는데 지하도를 지나쳤다. 마치 집으로 가듯 자연스럽게 집으로 가지 않은 것이다. 100미터쯤 걸어가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두고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리엇 온 언 엠프티 스트리트(Riot On An Empty Street)"를 들으며('있어빌리티'를 과시하려는 건 아니고 책 읽을 땐 팝송이 좋다. 가요를 들으면 가사가 귀에 들어와서 책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앞에서 밝혔지만 가요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루키의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읽었다. 다시 읽어도 역시 좋았다. 다만 금방 다 읽어버려 문제였다. 마침 가방에 노트북이 있었다. 회사 일 때문에 가지고 출근한 거였는데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때마침 뒷자리에 앉은 여자가 커피를 쏟았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흐익' 했을 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휴대폰을 들어 살핀 다음 냅킨으로 테이블을 닦았다. 흔히 있는 일인가 보다. 덤벙거리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건 해 줄 수 있는 일이 많아 좋다. 내 아내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둘 다 좀 그런 편이라 서로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긴 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하루키의 책:
그리고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를 듣는 중이다. 책 읽을 땐, 책에 집중하기 위해 주로 팝송을 듣는데(영어를 잘 못하는 건 이럴 땐 편하다), 갑자기 가사가 귀에 들어와 책 읽기에 방해가 되는 건 좋은 일일까?
스타벅스를 나와 100미터쯤 걸어 지하도로 들어섰다. 길을 건너 돌계단을 올랐다. 다행히 놀이터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들 사이로 걸었다. 매미가 맹렬하게 운다. 7년을 기다렸으니 이 정도 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벤치에 늙은 어머니와, 못지않게 늙은 아들이 앉아 있었다. 아들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다 말고 어머니와 자리를 바꾸었다. 바람이 아들에게서 어머니에게로 불고 있었던 것이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한 캔 샀다. 집으로 와 한 모금 삼키고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삼켰다. 꿀꺽, 몸속에서 바람이 일어 정수리로 빠져나갔다. 통통통,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다. 저녁엔 함께 돈까스를 먹어야겠다.
어쨌든 근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