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태극기를 돌려주세요

by 소기


언젠가 아이와 서울역에 갔는데, 태극기가 가득했습니다. 거기에 모인 수백의 사람들의 손마다, 그들을 둘러싼 여러 대의 버스에도 커다란 태극기가 있었습니다. 태극기의 바다였고 일렁이는 물결이었습니다. 찬란하고 감동적인 광경이어야 하는데, 그곳에는 경계와 갈등, 광기만이 가득했습니다.


아이는 태극기를 보고 그저 좋아했습니다. (그 부끄럼 많은 아이가) 애국가를 흥얼거리기도 했습니다. "아빠, 태극기가 왜 이렇게 많아?" 신이 나서 묻는 아이에게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서둘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오늘 아침, 아이는 눈을 뜨자마자 태극기를 찾았습니다. '일본이 더 이상 우리나라를 우습게 보지 못하게 된 날인, 광복절'에는 태극기를 달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비가 와서 거실에 태극기를 달았습니다. 아이는 그 앞에서 애국가를 힘차게 (4절까지) 불렀습니다.


거실에 단 태극기:
비가 왔지만 아이는 꼭, 태극기를 달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는 그 앞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그 모습이 퍽 슬펐다.


우리에게는, 지는 꽃처럼 스러지면서도 끝내 놓지 않았던 역사로서, 모두 함께 어때를 두르고 흔들며 울고 웃었던 축제의 경험으로서, 온 국민이 하나 되어 어둠은 빛을 가릴 수 없음을 입증한 증거로서 태극기가 있습니다. 그러한 태극기가 두려움과 혐오와 갈등과 반목의 상징이 되는 것은 너무나 슬프고 분한 일입니다.


태극기를 돌려주세요. 아이가 태극기를 달고 싶어 합니다.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어쨌든 근사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