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아는 미덕의 빛이 바랜 이유는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을 취하기 불리하기 때문이 아니다. 부끄러움은 개인이 자신의 현존을 이상에 빗대면서 생겨나는 열등감을 인식해 줄 타자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원자화됨으로써 독자적으로 온전한 자유를 누려야만 하는 현대 사회의 개인은 타인의 열등에 집중해야 하는 탓에 열등감 자체를 바라봐 줄 수는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원료 공급에 차질이 생긴 공장처럼 부끄러움의 생성 메커니즘은 작동할 수 없게 된다.
몸의 원리상 감정도 가르치고 배울 수 있지만 부끄러움은 교과 과정에서부터 배제되어 있다. 선천적으로 그 미덕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기꺼이 선생이 되길 자처하지만 교실은 비어있다. 문제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더 이상 관능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본(本)으로 삼고 싶어 하지 않으며, 멀리서 감상할 때만 편안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자연 풍경처럼 취급한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주장은 힘겹게 존속하고 있는 부끄러움이 관능을 잃게 된 까닭으로 그것의 강도를 의심케 하면서, 동시에 부끄러움에 대한 욕망이 왜 사회에 퍼져나갈 수 없는지를 설명한다.
정치권에서 빈번하게 들리는 '부끄러운 줄 알라'는 식의 비판에는 (발화자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게) 상대에게 실질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으므로써 타협을 위한 공간을 미리 확보해 두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정치인들은 대변해야 할 이상이 많은 만큼 부끄럽지 않아야 할 이유가 늘어난다고 느낀다. 몰염치는 능동적인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새로운 이상의 제시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일상이라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는 이상의 수는 커피의 원두 가짓수 보다 적지 않다. 이상의 부재가 아닌 이상의 과잉 속에서 부끄럽지 않아야 할 이유는 점점 더 진하게 배양된다.